“새가 장차 죽을 때에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장차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이다.”①
『논어』에 나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詩)적인 표현의 하나이다. 우리말로 읽어도 입에 착 감긴다.
"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 기언야선"
본문을 보면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중병에 걸리자 당시 세도가(孟敬子)가 문병 왔을 때 증자가 한 말이다. 증자는 "조지장사..."로 운을 뗀 후에 군자가 귀중히 여기는 세 가지 도(道)를 이야기했다. 군자는 죽을 때 죽더라도 높은 사람에게 폼 나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사태를 우리는 '곧 죽어도 도(道)'라고 인식하며 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소인)에게 있어 이 구절은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착한 짓 - 바람직한 일)을 하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예를 들면 화이트 데이라고 사탕바구니나 꽃을 사들고 갈 경우 필경 좋은 소리 듣기는 어렵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적어도 현상유지는 가능한 현명한 방법이 되기 쉽다고 믿는다.
그렇게 현상유지를 지속하다가 어느 날 제대로 잘못 걸리면 '새(鳥)'가 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새는, 생물분류상 조류에 속해 날개와 부리가 있는 생물이 아니라, 정신 못 차리고 산 소인의 비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새가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처량하고 슬프겠는가?
"새는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울음소리가 애처롭다"②고 하지만 사실은 속상하고 안타까워 그 울음소리가 슬픈 것은 아닐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안 그럴 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회와 반성의 솔직한 고백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새 우는 소리를 우리는 보통 "짹 짹"이라고 하는데 지금대로 산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짹 짹" 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고 군자처럼 죽을 방법은 없다. 지금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죽을 때 윤석열이나 안철수가 나에게 문병 올 가능성은 없다.
"사람은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니 말이 착하다"➂ 어쩌면 이 말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새가돼 슬피 울며 죽을지도 모르는 우리는 추억할 필요가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리고 그녀 집까지 바래다주고는 바로 보고 싶어 또 뒤돌아보던 날을.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꽃집을 기웃거리기도 그렇고 편의점 특별 매대에서 과대 포장된 사탕이나 초콜릿을 사는 것도 탐탁지가 않다. 백번 양보해 그런 것을 사들고 들어가 봐야 의심받거나 추궁받거나 "이제 철들었다"는 칭찬받는 것 중의 하나인데 뭐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나이는 체면을 지키고 나무는 껍질을 지킨다는데, 낯간지러운 상상 그만두고 해지길 기다려 새들끼리 모여 술잔이나 기울일 일이다. 오늘의 건배사는 '조지장사 기명야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