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주는 느낌이 자꾸 마음을 건조하게 한다. 가까이서 보면 하나도 성한 이파리가 없는데 대강 보고 단풍 곱다고 좋아하는 게 못마땅하다. 가을꽃들은 대부분 대가리가 작고 볼품없다. 그래서 애처롭다 못해 속상할 때도 있다. 날씨는 갈수록 스산해지는데 지금 배가 불러 어쩌려는지, 낯익은 짝귀 고양이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쫓다 그만두기도 한다.
딱딱하게 바싹 마르게 되면 서로 간의 구분도 분명해진다. 녹색의 거대한 덩어리였던 산들이 그루, 그루 나무들로 나누어 선다. 사람의 마음도 밖으로 향하지 않고 자꾸 안으로 움츠러들어 그저 혼자 울적해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①
그러고 보니 나의 경우는 외로움보다는 고독에 가까운 것 같다. 본래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성정인지라 다른 사람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교만의 가면 뒤의 나를 알고 있는 나는, 두려울 때가 많다. 그게 고독인지는 모르겠지만 두려움을 느낄 땐 다른 모든 감정이 제압되는 걸 보면, 고독보다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이 말한 외로움의 극치는 『논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을 바꿀 큰 꿈을 꾸며 천하를 헤매고 다녔지만, 꽝이 된 공자의 처절한 독백이다. 나는 절망을 이렇게 잘 표현한 구절은 없다고 생각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봉황새도 날아오지 않고, 황하에선 하도(河圖)도 나오지 않으니, 나는 끝장인가!.”②
봉황은 성인이 출현할 때, 그리고 성인이 취직될 때 나타난다는 성스러운 새다.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업고 나온다는 그림(하도) 역시 성인의 상서로움을 뜻한다.
쉽게 말해서 이미 나이는 정년을 지났는데 취직은 안 되고, 세상 돌아가는 꼴은 전혀 가망 없다고 체념하는 늙은 공자의 한탄이다.③
봉황과 하도, 그리고 "내 인생은 아마도 종 쳤다."④라는 수사의 높낮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높을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아프다. 봉황과 하도는 더 높을 수 없는 상징이다. 그래서 떨어진 것을 직감하는 공자의외로움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외로우면서 고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반대로 고독하면서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말장난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손등과 손바닥처럼 굳이 나눌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나눌 수 없는, 같은 감정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타인이(또는 세상이) 나를 외롭게 할 수는 있지만 외로울지 말지 결정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라는 점이다.
나는 늙어서, 또는 간절히 바라던 것을 실패한 후에, 봉황이나 용마를 상상하며 고독을 씹기보다는, 차라리 치킨을 먹고 회전목마를 타고 노는 쪽을 택할 것 같다.
뭔가 일이 잘못되면, 그 원인의 일부는 반드시 나에게 있다. 세상이 혼탁하고 개판일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그 혼탁과 개판에, 내가 기여한 부분은 덜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논어』에 공자의 반성문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식이나 며느리에게 사과하는 부모, 학생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선생,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가 매우 드문 세상을 만드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긴 하나의 문장은 그분이 싫어하신다. 또 그분이 날개털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외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