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인환이 한잔 술을 마시며 그렸던 그녀는, 목마를 타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가을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의 흰 날과 같은 살육(殺戮)의 계절이다. 오죽하면 가을을 일러 “항상 쌀쌀하게 말려 죽이는 것이 본심①”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끝내 박인환의 술병은 가을바람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뭘 타고 떠나던 알 바 아니지만, 어차피 가는 여자야 그렇다고 쳐도 술병은 왜 잘 건사를 못하는지, 시인의 부주의함이 안타까운 시다.
가을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토요일 그분도 떠났다. 조용필 콘서트를 본다고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떠났다.
나는, 발바닥이 데일 정도로 뜨겁지 않은데도 무대 위에서 펄펄 뛰는 게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다. 더욱이 내가 어디서 노래 한 곡 하려면 돈을 내야 하는데, 남의 노래 듣겠다고 노래방 며칠 빌릴 돈을 내고 표를 산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딱 한 곡은 듣고 싶은 노래가 있긴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떠났으니, 있는 술병이나 잘 간수하며 유튜브나 찾아볼 밖에.
이 노래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랩이다. 특히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다”는 구절이 아주 좋다. 어쩌면 썩은 고기도 잘 발라 먹으면 나쁠 것 같지 않은데, 구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여우와 신포도처럼’ 그냥 ‘정신승리’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뭘 하든 시간은 흘러 어느 결에 겨울의 한복판에 던져졌다. 겨울은 춥지만 조용하다. 칼바람이 대지를 누벼도 얼음장 밑이나 언 땅 밑에 깃든 생명 들은 비몽사몽간에 봄을 꿈꾼다. 그래서 겨울은 잉태의 순간이고, 생명의 시간이고 꿈꾸는 계절이다.
월드컵의 소란스러움이 지나고 느닷없이 찾아든 한파가 며칠을 못살게 굴더니 오늘은 좀 견딜만한 날씨가 됐다. 밖이 추울수록 안은 따뜻하고 바람이 세게 불수록 커피 향은 진해진다. 밤에는 술과 함께할 수 있어 얼큰해지고 아침엔 커피가 있어 맑아진다.
깊은 겨울, 태양의 땅 아프리카를 소환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 검은빛 대륙 복판에 솟은 킬리만자로산은 오히려 겨울에 함께 연상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산을 일러 ‘달의 산’②이라고 했다. 여기서 자란 커피는 깊은 겨울에 마시기에 아주 제격이다.
백두산과 같은 화산인, 달의 산! 그곳에서 자란 커피는 쌉싸름한 신맛을 기본으로 심지어 맵기까지 하다. 대구리가 굵직한 놈들만 골라 볶으면 자못 늠름한 아로마가 잘 어울린다.
그 스산한 계절, 허전한 시인(詩人)을 버리고 이상한 거 타고 토 깐 그 여자나, 조용필 콘서트 본다고 느닷없이 내뺀 그분은 절대 맛볼 수 없는 맛이다. 거기에 더해 설핏 느껴지는 아로마는 또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