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의 커피 - 苗而不秀 秀而不實

제9 자한 편(第九 子罕 篇) - 21

by 누두교주

가을은 하늘로부터 오지만 봄은 땅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봄을 눈으로 느낄 때면 이미 저만치 멀리 가고 난 이후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봄은 춥고, 아쉽고, 막연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감각하는 봄의 사건은 ‘새싹’이다. ‘움’이라고도 하고 ‘몽우리’라고도 한다. 크기는 작고, 기운은 연약하고, 감촉은 매우 부드럽다. 색은 가장 투명하고 냄새는 가장 옅다. 무엇보다 싹이나 움이나 몽우리의 모양새는 수줍다.


아직도 그 끝이 날카로운, 묵은 겨울의 바람에 파르르 움츠리는 작은 싹을 보면 속상하고 안타깝다. 녀석에 닿는 햇볕은 터무니없이 조금이다. 밤이 지난 아침에 보면 더 먹먹해진다. 어둡고 춥고 그래서 무서웠을 텐데.


싹을 틔우고도 꽃피지 못하는 이가 있다! 꽃을 피우고도 열매 맺지 못하는 이가 있다!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움을 틔우지 말아야 할까? 그래서 봄과 가을의 경계에서 가장 여린 몸을 내미는 녀석들이 더욱 고맙고 사랑스럽다.




나는 이 계절에 맞는 커피를 지난봄까지는 만나 보지 못했다. 커피를 잘 모르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원하는 원두를 찾아 부지런히 킁킁거리며 헤매야 하는 바지런함이 없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커피가 열매라는 점이다. 싹을 틔우는 계절의 느낌을 어떤 열매가 맛으로 향으로 그리고 느낌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그런데, 마치 만날 것이 예정됐던 것과 같은 경험을 했다. ‘코스타리카 따라주 SHB②’가 그것이다. 요 녀석은 그 이름이 주는 막연한 상상과 풍미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나는 코스타리카 하면 미인대회가 생각나고 노래방 배경화면이 생각난다)


커피콩을 수확하는 코스타리카 따라주의 농부 (출처;https://han.gl/hhIMn , 검색일, 2023. 02. 25)


우선 커피콩의 크기가 매우 작다.(지금까지 본 커피콩 중에 가장 작은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 계절의 느낌을 핍진하게 드러내고 있다.


포타필터의 주둥이를 지나 떨어지는 에스프레소의 결은 벨벳처럼 곱다. 느껴지는 아로마는 너무 옅어 수증기의 촉촉함이 먼저 느껴질 정도이다. 약간은 가벼운 듯하지만 부드럽게 얹어지는 바디감은 형체는 있지만, 무게는 없는 무엇을 연상시킨다.


지구 반대편, 1500미터가 넘는 높은 땅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맺힌 열매가, 다시 새싹을 닮고, 움을 닮고 몽우리를 닮았다.


그래서 녀석 덕분에 금년에 내가 만날 봄은, 다시 오는 그 봄이 아니라 새봄이다.


꽃을 피우지 못할지라도 열심히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지 못할지라도 바지런히 꽃을 피울,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봄이 다가오고 있다.



① 김영민 지음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서울. 2019. p. 248.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


② 코스타리카는 중앙아메리카 남부에 있는 대한민국의 절반정도 크기의 나라이다. ‘따라주’는 커피콩이 나는 동네 이름이다. 1500미터가 넘는 고지대라고 한다. SHB는 8단계 품질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의 표시로 Strictly Hard Bean의 약자이다.



keyword
이전 10화음모론과 공자 -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