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춥다고 한다. 기온이 대충 영하로 내려가면 춥다고 떠들기 시작하고 영하 10도쯤 되면 당장 무슨 난리라도 날 듯 재난 문자까지 울려댄다. 그래서 우리는 추워지기 전에 겨울을 넘기기 위한 준비(越冬準備)라는 것을 한다면서 수선을 피운다.
내 주변엔 북방 출신을 긍지로 사는 사람이 둘 있다. 한 분은 고구려의 후에를 자처하는 분인데, 한겨울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에도 절대 내의를 입지 않고 생활하신다. 그러다 어느 해 만주 봉천의 칼바람에 완전히 얼고 난 후 추위에 겸손해지셨다.
또 한 분은 말갈족의 후손이고 아니면 남이 장군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하는 분이다, 그분은 백두산추위 정도는 돼야 추운 거라며 자만하는 세월을 오래 보내던 중, 길림성 장춘의 밤거리에서 가로 (橫) 방향으로 날리는 눈보라를 겪고는 가급적 추위 이야기를 삼간다.
그런데 바다와 가장 먼, 북쪽 땅의 겨울은 추운 게 아니었다. 그곳은 춥지 않고 아팠다. 평소에 잊고 지내던 모든 사지 말단의 존재가, 통증을 통해 나에게 전달되어 왔다. 평생 살며 ‘낯가죽’의 의미를 몰랐었는데 마른바람이 한번 스치고 지나가자 내 낯가죽의 두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최고기온 11도 최저기온 26도. 물론 섭씨온도이고 영하다.
하지만 진짜 추운 동네에서 보니 추위는 추위가 아니었다. 그냥 때가 되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닥쳐올 추위에 부산을 떠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미 제 살 궁리들은 다 하고 있었다.
참새들이 토실하고 비둘기는 닭만큼 살이 오른다. 얼굴이 빨개지고 흰 김을 내뿜으며 노는 아이들이 입성이 참새와 비둘기를 닮아간다.
눈 밭에 참새가 전혀 추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당당했고 토실했다. 물론 촐랑거리는 것은 우리 참새와 다르지 않다.
몽골은 소고기 보다 닭고기가 비싸다. 중국은 닭고기보다 비둘기 고기가 비싸다. 우리는 몽골비둘기의 토실함을 중국에서 알지 못하게 할 시대적 사명을 띠고 있다.
눈이 처덕같이 와도 아무도 우산을 쓰거나 뛰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펴 들었던 우산을 슬그머니 접었다.
오후에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모자 쓴 사람은 많았다.
계단에는 신발 바닥을 닦고 미끄럼을 방지할 발판을 새로 붙이고, 문 앞에 신발 바닥을 닦을 작은 카펫을 두었다. 그래도 눈길을 걸어온 객의 신발에 남은 얼음과 흙이 바닥을 더럽힌다. 주인은 무심히, 그러나 꼼꼼히 바닥 밀대 걸레질을 반복한다.
온돌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무려 영하 20도가 넘는데도 바깥 창은 조금 열어둔다. 그래서 방 안의 공기는 항상 가볍다. 이불 밖으로 살을 내놓으면 좀 서늘하고, 집어넣으면 좀 덥다. 왜 그런지 서울에서는 겨울에 달고 사는 비염 증상이 여기선 오히려 가볍다.
내가 묶던 숙소의 바깥쪽 창 하나는 항상 열어 두고 있었다. 밤에 아무 생각 없이 이거 닫는다고 속옷바람에 나갔다가, 방에 못 돌아가는줄 알았다.
낮에도 좀처럼 영하 10도 이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먹어야 살겠기에 바깥출입을 하고 돌아오면 움츠렸던 몸이 펴지며 이곳저곳 간질 간질 해진다. 당연히 밝게 부서지는 햇빛, 진달래 끛, 얼큰한 찌개맛, 시큼한 막걸리, 수줍은 웃음 같은 것들이 몹시 그립게 느껴진다.
여기 사람들은 그곳을 ‘무지개의 땅(솔렁거스)’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리워하는 곳은 무지개의 땅이고 이제 돌아갈 생각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대문 그림 : 몽골 아파트 현관이다. 빨간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철문이 나온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단이 몇 개 나오고 그 계단을 올라가면 또 문이 나오고 그 문을 열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창도 크지 않다. 창을 감당 못하게 크게 만들고 춥다고 뽁뽁이를 붙이는 것과 비교된다. 왼쪽 하늘색 문은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