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는 언제나 편안히 누워있길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하루에 한, 두장씩 시간을 내어 필사하고 있는 책이다. 내가 쉽게 손을 대지 않는 책들의 구절이 많다. 고전문학, 외국 소설 등이라 제목은 들어봤지만 잘 모르는 그런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재미있기도 하고 모르는 책의 단 한 부분을 보고 나의 생각을 가볍게 덧붙여가며 그렇게 책을 활용하고 있다.
그래, 오늘은 월요일에 필사를 했던 <백의 그림자>. 필사를 하고 끼적였던 내용을 조금 확장해서 써보자.
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처음엔 그림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덤불을 벌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저쪽도 길인가 싶고 뒷모습이 낯익기도 해서 따라들어갔다. 들어갈수록 숲은 깊어지는데 자꾸 들어갈수록 뒷모습에 이끌려서 자꾸자꾸 들어갔다.
정말 처음 보는 책이었기에 딱 이 장면만 가지고 상상해야 했다. 나를 유혹하는 숲의 악령인가? 왜 자꾸 깊고 깊은 숲으로 나를 이끄는 거지? 그림자? 그림자는 나의 그림자일까? 낯익은 모습이라고 했으니까 정말 나인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었지만 정답은 직접 읽어보기 전에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초록창에 검색해보았다. 이 그림자 이야기는 남자 주인공인 '무재'의 아버지 이야기였다. 남의 보증을 잘못 섰다 빚더미에 앉게 된 무재씨의 부모님. 이를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죽고 만다. 어느 날 일어서버린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간 아버지는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는 어머니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쫓아간 것이다.
그런데 더 찾아보니 무재 아버지의 그림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여자 주인공인 은교의 그림자도 일어나고, 남자 주인공인 무재의 그림자도 일어났다고 한다.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 삶의 무게를 버티지 못했을 때 그림자가 벌떡 일어난다고 작가는 표현한다.
원래 일어서 있는 나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하고 항상 음지의 존재인 내 그림자가 나의 어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버텨내고 버텨내다가 참을 수 없을만큼 어둠을 가득 안았을 때, '나도 못참아!' 하고 일어나는 것일까?
나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하고 있는 나의 그림자는 매일 나와 함께 하는 나의 그림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냥 필사를 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림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옆에서 보던 옆지기가 제목을 보더니 '그림자가 일어선다?' 라고 소리내읽었다.
"아, 이건 내가 쓴 표현이 아니고 필사한 책에서~"
"그림자는 나의 어둠이잖아."
"어!! 맞아!!"
한번에 캐치하다니 옆지기가 새삼 달라보였다. 사실 이 대화를 할 때 옆지기는 얼큰하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그러고보니 필사할 때는 무재 아버지의 이야기로 그냥 넘겼는데, 은교와 무재의 그림자는 왜 일어났을까 궁금해진다. 그들에겐 또 어떤 버거운 삶의 무게가 있었을까. 그들의 어둠은 무엇일까. 도서관에 이 책이 있는지 찾아보고 내일 대여해와야겠다.
그나저나 그림자가 일어선다니, 발상과 표현이 어마어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