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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솔 Sep 30. 2019

(작가의 재구성) 별 하나에 사랑과 점 하나에 김환기

그리움 가득한 한국의 정서를 간직한 김환기의 예술 세계

예술플랫폼 <아트렉처> 연재 중인 글이다.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그리고

03-II-72 #220(‘붉은 점화’), 코튼에 유채, 254x202cm, 1972, 환기미술관


여기 김환기가 있다. 윤동주가 별을 그리듯 시를 썼다면 김환기는 별을 그리듯 점을 찍었다. 2017년 서울 옥션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일명 ’붉은 점화’(1972)가 6,200만 홍콩달러(한화 약 85억 원)에 낙찰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날 이후 김환기 작품은 다시 한 번 새롭게 조명되었고 덩달아 한국의 현대 추상미술(특히 단색화)에 대한 세계의 관심도 높아졌다. 단연코 김환기는 현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주자 중 하나이다.

10-VIII-70 #185(<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코튼에 유채, 292X216cm, 1970, 환기미술관


김환기의 대표작이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의 하나인  <10-VIII-70 #185>는 친구였던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저렇게 많은 별 만큼이나 저렇게 수많은 점들이 찍혀 있다. 그 모든 것은 김환기 스스로 찍은 점이다. 그 중 하나가 그 자신을 내려다 본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많은 점 중에서, 그 점 하나를 쳐다본다. 너무나 많은 점들 속으로 사라지는 자신, 그렇지만 그 많은 점 하나. 그 하나가 김환기의 인생이고 김환기의 친구이고 김환기의 가족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김환기의 추상은 수단으로서의 추상일 뿐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상이다. 하나로 표현할 길 없는 세상의 진실을 단 하나의 점에다 담았을 뿐.


밤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있다. (물론 도시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 수많은 별들은 나와는 상관 없이 하늘에 떠 있지만 내가 그 별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나의 별'이 된다. 그렇게 밤하늘에 수없이 떠 있는 별들을 화폭으로 가져온다면 어떻게 변할까. 내가 바라보는 김환기의 점화는 밤하늘의 별을 따다 화폭에 수놓은 것들처럼 보인다. 까마득하고 세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 하나, 하나에 마음을 담아 사연을 담아 화폭에 옮기는 일, 그 얼마나 고되고 힘든 작업일까. 그렇지만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


그가 처음부터 추상화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김환기의 작품 세계는 크게 도쿄, 파리, 뉴욕으로 구분하는데, 김환기가 본격적으로 추상화에 빠져든 것은 ‘뉴욕통신’ 시절로 부르는 뉴욕에서의 시간이었다. 1963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새로운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한 뉴욕에 머물렀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김환기는 점, 선, 면으로 압축된 구상과 단순한 형태를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형성했다. <1-VIII-1967> 작품은 그가 다양한 형태의 사물을 기호에 가까운 추상의 형태로 구현했던 시도를 엿볼 수 있다.


1-VIII-1967, 캔버스에 유채, 177x127cm, 1967, 환기미술관


뉴욕에 오니 제법 계절감이 있어서 서울을 연상케 합니다. 떠나오면 으레 그리운 법이어서 몰두하는 시간 이외에는 서울 생각, 선생님들 생각, 우리 학생들이 간절히 보고 싶을 뿐입니다. - 1963년 11월, 뉴욕


뉴욕에서 김환기가 썼던 일기를 보면 짙은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서울에 대한 그리움, 동료 교수들에 대한 그리움, 학생들에 대한 그리움, 자식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아내 향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특히 김환기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그를 지지했던 아내 향안에 대한 애뜻한 사랑은 ‘향안에게’라고 시작하는 그가 보낸 그림 엽서와 그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윤동주의 시에서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이 가진 그리움의 정서이다.


“어제는 어쩐지 뒤숭숭해서 거리에 나갔지. 우연히 레이몬드라는 화가를 만났어. 내 스케치북을 보였더니 경이적인 태도였어. 너무 동양적인가? 물었더니 그렇지 않대. 대단히 오리지널하대. 쬐그만 작품이 우주감을 준대. 묘한 색깔이래. 게다가 진지하게 내 그림을 보아 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기쁘고 용기가 나요.” - 1963년 12월, 뉴욕


한국에서 안정적인 교수 자리를 박차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했던 뉴욕 생활은 김환기 그 자신에게도 아무런 확신 없는 불안이 잠재된 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자신의 그림을 진지하게 봐주며 오리지널하다고 칭찬하는 레이몬드라는 화가에서, 빨리 와서 자신의 작품을 보아달라며 “향안, 빨리 와야겠다.” 하며 시작하는 그림 엽서에서, 인정과 그리움만큼이나 예술을 위한 창작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떨치고 떠났던 뉴욕에서 김환기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예술과 만났다. 그것이 바로 ‘점화’라고 부르는 그의 독특한 회화의 방식이었다. 둥근 점을 찍거나 둥근 점을 다시 둥그스름한 네모로 다시 감싸, 이러한 점을 수없이 찍어 단순한 패턴을 만든 추상이 그것이다. 예술은 절박함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라고 말했던 그의 예술 세계에 딱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마구 찍은 점 같아 보여도 그것을 찍는 예술가는 점 하나 하나에 그의 모든 것을 건다. 시구 하나로 밤을 지새우는 시인처럼.

이 작은 소책자가 김환기의 인생과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부암동에 위치한 ‘환기 미술관’에서는 ‘환기재단 40주년 특별전 - Whanki in New York : 김환기 일기를 통해 본 삶과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김환기 전시를 하고 있다(2019년 현재). 2019년 말까지 진행 중인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쓴 일기, 그가 보낸 그림 엽서에 남은 김환기의 글을 통해 그의 삶과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막연하게 다가오는 추상화도 그가 쓴 일기와 그림 엽서를 보면 부족하나마 그의 마음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도슨트의 설명도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옆 전시관에서는 ‘2019 환기미술관 학술연구전 : 김환기, 자연추상’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함께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서는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김환기의 점화 두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하나는 <Duet>(1974)이고, 다른 하나는 <Universe>(1971)이다. <Duet>은 마치 숲과 나무를 동시에 표현한 작품처럼 다가온다. 짙은 녹음을 담아낸듯 수많은 점들은 하나의 나무이자 하나의 숲으로 변해 있다. ’solo’가 아닌 ‘duet’이라는 말에 이런 중첩된 이중주의 느낌을 담아내려 했던 건 아닐까. 아니면 그곳을 거닐었던 두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Duet> 22-IV-74 #331, 코튼에 유채, 178x127cm, 1974, 환기미술관

<Universe>에서는 김환기가 바라본 우주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두 은하가 하나의 중심을 가진 채 맴돌고 맴도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대형 작품이다. 그것은 물리적 우주이자 심리적 우주이다. 은하수가 가로 놓인 밤하늘을 보며 꿈꾸었던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 그가 평소에 사랑했던 ‘백자’에 담긴 한국의 미학,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윤동주의 마음처럼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이네들은 너무나도 멀이 있지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면 이네들 역시 내 곁에 있을 수 있다. 점 하나에 자신의 예술을, 점 하나에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점 하나에 자신의 인생을 찍었던 그의 모든 것. 그것이 김환기의 우주이자 ‘universe’이다.

<Universe> 5-IV-71 #200, 1971, 코튼에 유채, 254x202cm, 환기미술관

윤동주의 마음처럼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이네들은 너무나도 멀이 있지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면 이네들 역시 내 곁에 있을 수 있다. 김환기의 마음을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이 우주에서,
우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어딘지 모를 무한한 공간에서, 무엇인지 모를 하나의 존재가 되어
또 다시, 만날까?


예술, 인간 이상을 향한 진격
by 김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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