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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Oct 26. 2022

'그럴싸함'에 대한 인간의 믿음

권위에의 호소의 오류와 잘못된 믿음


베이컨이 말한 네 번째 우상인 '극장의 우상'에 대해 알아보자.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이란 전혀 실제적이지 않으면서 극적으로 구상한 세계관을 가진 철학적 논문들이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럴싸한 과학의 원리와 수학적 공리 등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지식들을 싸잡아 ‘극장의 우상’이라 명명하였다.


'극장'이라는 이름은 '극장'에서 벌어지는 연극적 요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극장 자체가 이미 가상의 공간이고 그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극 역시 가상의 상황임에도, 그것이 실제인양 희노애락을 느끼며 감상에 젖어드는 인간의 불안정함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동굴의 우상’에서의 ‘동굴’에서 결코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다.


오래도록 전해내려온 전통이나 관습, 무비판적으로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들 또는 종교적 교리들도 '극장의 우상'에  해당한다. 그 연원도 알지 못한 채 오랜 옛날부터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극장의 우상'이 가진 특징이다. 무조건적인 전통이나 관습의 배제라기보다도 불합리한 것들을 거부하고 현재 상황에 맞지 않는 것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극장의 우상
= 불합리한 관습과 권위


베이컨이 살던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천동설'을 보면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천종설은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종교적 믿음에 따른 이론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교회는 당시 유럽 사회를 통제할 수 있었다. 베이컨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던 갈릴레이가 ‘지동설’로 종교 재판을 받았던 사실은 정말로 유명하다.


'극장의 우상'은 '권위에의 호소의 오류'라는 논리적 오류와 맥락을 같이하는데, '권위에의 호소'의 오류란 어떤 권위를 가진 대상에 대한 맹신이나 무비판적 수용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그 학자가 그랬대" 또는 "텔레비전에 나왔대"라고 하며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이나 매체의 보도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설마 학자가 거짓말을 할 리 없고, 설마 공영 매체가 잘못된 사실을 전할 리 없으니 믿어도 될 것이다, 라고 스스로 가정을 하며 기정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견해나 특정 기관의 입장이 맹목적으로 지지되면 그들의 권위가 절대화되어 이에 대한 비판조차 용인되지 않는 경직된 사회가 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열린 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이 확대되면 개인의 주체성이나 다양성을 부정하고 한 가지 이념만을 추구하거나 획일화된 가치를 지향하게 되는 전체주의적 사회로 변질될 수도 있다.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믿음은 듣기도 싫고 외면하고 싶다. 나아가 부정하고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맹목적인 믿음이 가져온 결과
혐오, 배제, 분노


맹목적인 믿음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우리 사회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끼리 다투고, 서로 다른 학설을 믿는 사람끼리 다투고, 서로 다른 관습을 지닌 사람끼리 다투고, 서로 다른 의견과 취향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다툼의 소지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 서로 다투지 말자며 문제를 회피하는 사회 분위기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1인 미디어가 난립하는 요즘에는 채널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채널만을 듣기도 해서 더 큰 문제이다.


무턱대고 믿는 것도 문제지만 그 '믿음'이 깨어졌을 때도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비난의 화살은 '믿었던 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이 '믿었던 대상'에 돌아간다. 전문가의 견해나 공신력 있는 언론의 보도를 자기의 견해인 것마냥 여겼다가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분노와 비난을 가하게 된다. 자신이 믿는 '것들'의 내용이 중요하기보다 '내'가 그것을 믿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를 결코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상'은 우상 자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든 우상을 스스로 '신봉' 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문제임을 간파해야 한다. 그럴싸한 믿음으로 그럴싸하게 아는 체를 하기보다 무엇이 진실인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나의 믿음을 포기하기 힘들까? 이는 '내'가 잘못됐고, 실패했고, 패배했음을 인정하기 싫어서가 아닐까? 연극에 심취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자신의 믿음이 진실도 진리도 아닐 수 있기에.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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