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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Aug 24. 2024

도덕경 50장 죽는 대신 살 방법을 찾아

햄릿의 고뇌와 노자의 답변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노자 도덕경 50장 번역 및 해설


본문


태어나면 죽기 마련인데, 잘 사는 무리가 열에 셋, 잘못 사는 무리가 열에 셋, 잘 살다 (갑작스레) 죽음으로 향하는 무리가 열에 셋이다.


왜 이럴까. 너무 잘 살려 하다보면 그렇다. 섭생을 잘하는 이는 육로로 길을 가더라도 범이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전쟁에 나가더라도 무기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들었다. 들소가 뿔로 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거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으며, 군인이 칼날로 자를 곳이 없다. 어찌하여 그런가. 사지로 뛰어들지 않기(잘못 사는 방식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앙을 힘으로 막아 싸워 없앨 것인가? -<햄릿>


인류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가 남긴이 문장은 햄릿을 삶과 죽음 앞에서 한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햄릿형 인간’이라 부르나, 사실 그 당사자인 햄릿은 오랜 고뇌 끝에 결단을 내린다.


한 자루의 단도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인데. 누가 지리한 인생길을 무거운 짐에 눌려 진땀을 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죽은 다음의 불안이 있으니까 문제지. 나그네 한번 가서 돌아온 적 없는 저 미지의 세계. 그것이 우리의 결심을 망설이게 해. -<햄릿>


그렇게 햄릿은 칼을 쥐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조와 어머니를 차지한 삼촌을 찌른다. 그리고 본인도 죽는다.


인간에게 운명이 있다면 햄릿의 운명은 여기까지이고 자신의 운명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처음에 햄릿이 고뇌했던 이유는 삶에 대한 집착에 있었다. 한 번 뿐인 인생, 이래 살든 저래 살든 고려할 게 아닐지 모르나,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그것이 두렵기에 햄릿은 고뇌한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 앞에서 햄릿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자신의 운명 앞에서 -그런 운명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누구는 삶에 집착하고, 어느 누구는 삶을 외면하고, 어느 누구는 삶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섭생이란 잘먹고 잘사는 일이다. 웰빙과 같은 뜻. 다만, 노자의 사상은 훗날 섭생을 넘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신선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신선이 되고자 온 세상을 뒤져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 정도 부와 권략이 있다면 누구나 죽기 싫을 테지.


이렇게 너무 잘 살려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되는대로 살자며 삶을 방치하는 이들도 있다.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를 표방하는 욜로족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한 번 뿐인 인생 즐기자며 무모한 행동을 하여, 때론 나라에 따라 욜로는 매우 무모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가리키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잘 살다 갑자기 망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거나 갑자기 돈이 많아는 등의 사건이다. 이런 경우, 가족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몸에 병이 생기는 등의 일이 일어나 삶 전체가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노자는 사지로 뛰어드는 대신에 무리하지 말고 균형을 갖춘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햄릿의 고뇌에도 이런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왕이 된 작은아버지를 죽이자니, 그 죽음이 불러올 후폭풍이 무엇일지 걱정되었을 태고, 그것을 떠나 과연 그런 살인 행위가 올바른지 물었을 것이다. 죽은 아버지의 망령이 나타나 햄릿에게 자신의 복수를 종용했지만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일지 말지는 또다른 문제이기도 했다. 이처럼 햄릿은 ‘고뇌하는 자의 표상’이다.


그리하여, 햄릿의 고민은 단지 죽느냐 사느냐 To live or to die 의 문제에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의 방식의 문제, 존재 방식의 문제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이 더 나은 방식이고, 무엇이 진정한 내 존재의 방식일까 To be or not to be 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노자의 대답은 한결같다.

“너 자신이 되고 무위로 살아라.”


* 노자 도덕경 1-30장은 아래에서

https://brunch.co.kr/brunchbook/taoteching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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