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최선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그 정치가 어수룩하면 그 백성도 수더분하고, 그 정치가 잗달면 그 백성도 약아빠진다.
화란 복이 기대어 있는 곳이고(화라고 생각하는 데서 복이 나오고), 복은 화가 누워있는 것이니(복이라 생각하는 데 화가 숨어 있다),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는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올바름이 변하여 이상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간사한 것이 된다. 사람이 얼마나 미혹한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그리하여 성인은 반듯하면서도 잘라내지 않고, 예리하면서도 찌르지 않으며, 곧으면서도 또렷하지 않고, 환하면서도 드러내지 않는다.
너무 착한 사람 곁에도 너무 악한 사람 곁에도 사람은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너무 착한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너무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너무 악한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언제 위협이 가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말 올곧은 사람이 한순간 방탕해질 수 있고, 끝까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한순간 원칙을 저버릴 수 있다. 올곧기 위해 그른 것을 부정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아넘길 수 없는 성향은 어느 하나에 대한 집착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삶이 그렇듯 옳은 것과 그른 것, 원칙을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때가 많다. 때론 하얀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고, 한 사람의 진심이 꼭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덮어두고 넘어가는 일이, 모른 척 하는 일이 더 나은 선택이기도 하다.
36장에서 노자가 말한 미명(微明, 희미한 밝음)이 떠오르는 58장이다. 흐릿한 경계에 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애매모호함에 관한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단시간에 얻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설익음에 대한 깊은 사색과 자신 안에 가진 모순을 직시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 후에, 그것이 보인다고 해서 마치 쓰레기처럼 내던져버리거나 곪은 상처처럼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쓰레기가 음식의 일부이고, 그 상처가 몸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무턱대고 버리고 도려내다보면 남아날 게 없을 테니. 노자뿐 아니라 수많은 고대인들이 말해왔던 세상 구제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성인은 다른 사람을 올곧게 이끌면서도 다른 사람이 비뚤어진 것처럼 느끼게 않게 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악하다 느끼지 않게 한다. 반듯하다고 잘라야 하는 것고, 예리하다고 찔러야 하는 것도, 곧다고 해서 또렷해야 할 것도, 환하다고 다 드러낼 일도 없다. 그저, 그렇구나, 하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신이 한 일을 자랑처럼 떠벌리지 않는 데 있다. 이는 노자가 줄곧 강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가 옳은 일을 했고 내가 바른 일을 했다면, 누군가는 그에 비추어 틀린 일을 했고 삐뚤어진 일을 했을 테니 말이다.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감싸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물론 최근에는 너무 감싸기만 해서 문제가 있지만).
이를 통해 이룩하려는 것은 결국 백성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사이좋게 살아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 정치가는 모른 척 바보인 척 굴면서 조금 어수룩한 것이 낫고, 너무 세세하고 째째하며 잗달게 굴면 백성들도 손해 보지 않게 계산하기 시작한다. 결국 공동체는 무너지고 삶은 더 팍팍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인의 정치는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은근히 따르게 만든다’.
*노자 도덕경 1-30장은 아래에서
https://brunch.co.kr/brunchbook/taoteching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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