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나쁜 날

7월 11일

by 너랑

그런 날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이유도 없이 눈이 번쩍 떠지는. 잠에 다시 들려고 노력해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일찍 일어난 김에 평소에 잘하지 않던 고데기를 하고 화려한 원피스도 입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수면이 부족한 탓인지 조금 예민해지는 기분도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려 했다.


순조로웠던 아침과 다르게 어학원의 수업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학원에서는 항상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잘 지냈는지, 어제 무엇을 했는지 말하는 시간이 있다. 선생님은 모두에게 안부를 묻고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다.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불과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 클래스에서 투명인간이 된 기분에 황당했다. 하지만 너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피곤해서 그러려니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다.


문법시간에는 다들 대답을 잘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문법에 자신이 없었으나, 정적이 싫고 선생님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대답을 하려 했다. 그런데 대답하는 내 모습이 무언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며 확인받는 것을 지적했다. 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건데, 그런 걸로 한 소리 듣자 왠지 기운이 빠졌다. 대답하고 싶은 의지조차 사라졌다.


조별모임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와 같은 팀이 된 독일인과 호주인은 옆자리에 앉아 내가 들을 수조차 없게 서로 소곤거렸다. 선생님에게 한 소리를 듣고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나는 구차하게 그들에게 껴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그래서 혼자 과제를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혼자서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아서 혼자 한다고 대답해 버렸다.


수업을 듣고 집에 오니 기분이 너무 불쾌했다. 한숨 자고, 밖으로 치약을 사러 나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무언가를 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홀린 듯이 가방을 뒤져 보았다. 젠장. 그것이 없었다. 망했다. 그 일이 기어코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열쇠를 집 안에 두고 나왔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유튜브를 찾아보니 문을 따는 방법들이 많이 안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단은 밖으로 나왔으니 다시 현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공용 현관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터치키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관을 통해 누가 들어가거나 나올 때 따라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현관에서 기다리는데 아무도 나오지를 않았다. 시간은 계속 지나갔다. 현관 앞에서 서성이면서 남들에게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자포자기하려던 순간, 한 할머니가 나왔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면서 현관으로 들어갔다,


집 문 앞에 섰다. 유튜브에서는 카드로 문을 여는 방법들이 있었다. 나는 희생양이 될 카드를 준비했다. 그리고 문을 따려고 하는데 도통되지가 않았다. 될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열쇠공도 불러 보았으나 열쇠공도 두 시간 동안 땀을 흘리더니, 자기는 못하겠다며 가버렸다. 나는 복도에서 처량하게 서있었다. 카드로 문을 따며 한 시간, 열쇠공을 기다리느라 두 시간, 열쇠공이 문을 따는 것을 기다리느라 두 시간을 보냈으니 총 다섯 시간을 건물 안에서 꼼짝 없이 갇혀 있었다. 숨이 막혔다.


이곳저곳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조언이 없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디선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집주인에게 여분의 키를 보내달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한국에 있는데 국제 우편으로 오려면 그동안 나는 어디서 지내야 하나. 지금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가야 하나. 아. 짐은 집 안에 있지. 그럼 짐 없이 어떻게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그때 어학원에서 사귄 친구 알리가 도착했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먼 길을 와준 것이었다. 반가운 맘에 눈물이 왈칵 날 것만 같았다. 친구는 물을 사가지고 와서,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우리는 밖에 나가서 함께 조금 걷다가 카페에 앉았다.


한국은 새벽 세시였다. 이 비보를 집주인인 친구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시차 때문에 그녀에게 언제 답장을 받을 수 있을지 요원했다.


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갈 곳을 잃어버렸지만, 파리는 야속하게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파리에서 홈리스가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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