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
콘서트에 가니, 마일리스의 친구인 다니엘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새로운 만남을 부담스러워하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친구의 친구를 소개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나도 새로운 사람이라면 무조건 환영이기 때문에, 친구의 친구를 만나는 게 오히려 좋았다. 다만 콘서트를 보는데, 음향이 너무 좋지가 않고 노래도 다 모르는 것들이라서 흥이 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음악을 즐기는 척, 음악에 몸을 맡기는 척 인내심 있게 두 시간가량을 서있다 보니 허리까지 아파왔다. 다른 친구들의 표정을 보니 다들 억지로 흥을 내는 듯 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콘서트를 포기했다.
그리고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앉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다니엘의 친구도 합류를 했다. 다니엘의 친구는 프랑스 사람답게 영어를 하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그리고 부끄러운지 자꾸 자기 발 끝만 보고 있었다. 자기가 영어를 해야 하는 줄 알았다면 안 왔을 거라고 했다. 거기다가 모르는 베르사유에서 왔다는 청년도 자기소개를 한 뒤 함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베르사유 청년도 영어를 할 줄 몰랐기에 프랑스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점점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계속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았다. 적당히 눈치를 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다들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야간 버스가 운행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표시만 전광판에 떠있을 뿐이었다.
웰컴 투 프랑스.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달리 방법이 없어, 우리는 새벽까지 운영하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니 다니엘의 다른 친구들인 커플까지 있었다. 눈덩이처럼 사람들이 불어나는 느낌이었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뉴비를 좋아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들 역시 영어를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직 나의 프랑스어 수준은 그게 아닌데 너무 프랑스어 인풋이 많아지자 금방 지쳐버렸다. 눈을 껌뻑이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고 애썼다. 물론 전혀 도움은 되지 않았다. 갑자기 “나는 어제 했습니다. 조깅을” 수준의 프랑스어를 하다가 원어민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알파벳을 배우자마자 cnn 뉴스를 듣는 느낌이었다. 못 알아듣는데 흥미로운 척하는 것도 힘겨워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야간 버스는 소식도 없었다. 왜 오지 않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좋은 일이 일어났다. 한참을 격렬한 대화를 나누다가, 커플 중 여자친구가 컵을 깬 것이다. 계속 웃으면서 농담을 하던 것과 달리 컵을 깬 후 그녀의 기분은 저조해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꾹 닫았다. 그녀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미안하지만 나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이제 말을 안 하는 사람이 두 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분위기를 흐리는 것이면 어쩌나 생각했지만 이제는 두 명이나 말을 하지 않으니 짐을 나눠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되었다. 야간 버스는 계속해서 운행이 되지 않았다. 물론 다들 아직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버스 정류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별 수 없이 우리는 센 강을 따라서 집까지 걷기로 했다. 갑자기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새벽에 파리를 걷게 된 것이다. 아, 영화의 주인공이 자의적으로 걸은 것과 다르게,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걷는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집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내일도 어학원에 가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새벽 세 시에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혼자였으면 무서웠겠지만, 그래도 무리와 함께 걸으니 덜 무서워졌다. 그리고 무서운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계속 걸으니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우와! 이리 와봐! 토끼다! 토끼!”
한참을 걸어가는데, 토끼가 있다며 돌아오라고 친구들이 불렀다. 돌아가보니 앵발리드 안에 많은 토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AI처럼 집을 행선지로 입력하여 기계처럼 돌아가고 싶었는데, 다들 토끼 보러 돌아오라고 하다니. 역시 청춘은 좋은 것인지, 프랑스인은 낭만적인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다들 한참을 토끼를 구경했다. 나도 토끼를 보고 있으니 왠지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당한 일을 더 재미있어했던 치기 어린 날들로.
어느 정도 걷자, 마일리스의 집과 나의 집은 가는 방향이 달라졌다. 지금부터는 혼자 가겠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나 마일리스는 고민하더니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저번에 만난 이상한 사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들 피곤했을 텐데도 그들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떠났다. 또 누군가에게 이렇게 도움을 받았다. 감사했다.
주말에는 이상한 사람이 집 앞까지 쫓아와서, 용기 있는 여자분의 도움을 받고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야간 버스가 아무 이유도 없이 끊기는 바람에, 우정의 소중함까지 알게 되다니. 흉한 일은 타인의 선의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