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추격전

6월 24일

by 너랑

고요한 주말도 좋지만, 파리에 왔으니 한 번은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고 싶었다. 어학원에서 사귄 친구들과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파리에서 하는 펍 크롤을 알아보았다. 펍 크롤은 주최 측이 사람들을 모아서 술집을 여러 군데 데리고 다니면서 술을 함께 마시는 프로그램이다. 혼자 다니는 것에 비해 가성비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국적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장점이 있다.


파리의 펍크롤은 다른 도시들의 펍크롤에 비해서 훨씬 규모가 컸다. 내 대화 상대는 이탈리아인이었다가, 인도인이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캐나다인이었고 그 후엔 브라질인이 되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은 욕구를 해소해 주던 펍 크롤은 마지막을 향해갔다. 어느새 내 옆에는 동양인을 좋아한다는 프랑스인 남자가 앉아있었다. 자꾸 끈덕지게 말을 붙이며 스킨십을 시도하는 그에게 부담스러움을 느껴서 배까지 아파왔다. 그래서 서둘러 집에 가야겠다고 펍을 나섰다.


펍 앞에 나오니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 사람의 눈은 초점이 하나도 없어서 약에 취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프랑스어 할 줄 아냐고 묻더니, 그 후에는 영어로 “너 스넙 있어?”라고 물어봤다. “그게 뭔지 몰라 미안. “이라고 대답했더니, 이제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봤다. 스넙이 뭐길래 그렇게 절박하게 삼개국어를 사용해서 스넙이 있냐고 묻는지. 하지만 사실은 스넙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 괴상해 보였다. 한시바삐 그와의 대화를 끝내고 지하철 역을 향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남자가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낌새가 이상해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전철역 쪽으로 갔다가 원래 방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남자는 계속 따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승강장에서는 나와 먼 곳에 있었던 그가, 전철을 타고 보니 어느새 같은 객차에 타있었다. 펍에서 집은 몇 정거장 걸리지 않았다. 몇 분새 나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서있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나의 모습을 가렸지만, 그 사람이 전철에 비치는 모습을 통해서 나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은 관광지가 아니고 주거지여서 내리는 사람들이 적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따라 내렸다.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얼핏 본 그의 모습은 눈이 풀린 채로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좀비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내 등뒤를 쫓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드디어 지하철 출구였다. 이 사람을 우리 집까지 따라오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따돌려만 했다. 잠시 기다려 그를 먼저 출구로 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슬쩍 올려다보니 그 사람은 계속 출구에 서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개표구에 카드를 찍고 미친 듯이 환승역으로 뛰었다.


파리의 지하철역들끼리는 서로 가까워 다른 호선을 타고도 집에 갈 수 있었다. 밤이 늦은 터라 7분 뒤에야 전철이 온다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7분이었다. 그가 들어와서 나를 찾아내면 어쩌나. 그가 돌아오면 가서 날 왜 쫓아오냐고 맞수를 두는 것이 나으려나. 온갖 걱정이 토할 듯이 몰려왔다.


전철이 2분 후에 도착한다고 알림이 떴을 때였다. 한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남자가 너를 쫓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여자도 믿을 수 없었기에, 경계하면서 어떤 남자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나만 괜찮다면 자기가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남자는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고, 일행이 없던 것 같았다. 그리고 터져버릴 듯한 긴장감이 너무 힘겨워서, 이 여자를 믿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녀는 전철에서 내가 겁에 질린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해서 한참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도 그 남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 남자의 마지막 모습도 알려주었다. 그는 내가 나오기를 한참 동안을 출구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전철역으로 나를 찾으러 갔다고 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신경이 쓰여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걱정 말라고 나를 다독여 주었다. 갑자기 이런 호의를 받게 된 것이 얼떨떨했다. 필요한 순간에 이렇게 누군가가 나타나주다니. 내게 수호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파리는 이상한 도시 같아. 어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날 쫓아오고, 어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다니."


나는 패닉상태에 빠져 아무 말이나 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다.


“그래,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있네."

집 앞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들을 보면서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내가 건물에 들어가면, 상황을 지켜보다가 몇 분 후에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간 뒤에도 정말 우리 집 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 물어봤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금방 잊어버리고 말했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계속 입으로 되뇌었는데도. 스스로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펍크롤에서 별별 사람들과도 다 인스타그램 교환을 했는데 정작 나를 도와준 천사 같은 사람의 연락처도 이름도 기억 못 하다니 속상했다.


프랑스어도 잘하지 못하는 동양인 여자를 돕기 위해 손 내밀어 준 그녀. 본인도 위험해질 수 있었을 텐데 나서준 그녀의 용기에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커피 한 잔 얻어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성숙한 사람이라면 내가 다른 여성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이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도움을 주는 것을 더 바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가 받은 이 마음을 품앗이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다. 비록 어이없게 입 안에서 맴돌던 그녀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이 고마운 마음만큼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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