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 Pebbles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르고 며칠 뒤, 나는 속초의 한 리조트에 있었다. 새내기 배움터, 일명 ‘새터’라고 부르는 2박 3일짜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둘째 날 저녁을 먹은 뒤였다. 과별로 색깔을 맞춘 후드티를 입고서 사열 종대로 리조트 로비에 마련된 무대를 보고 있었다. 새내기가 준비한 연극이 끝나고, 단과대학 동아리 공연이 이어졌다.
점점 흥이 달아오르고, 마지막 순서에 밴드 ‘샌드페블즈’가 나왔다. 수시 합격생 오리엔테이션 때 만났던 언니가 건반 앞에 있었다. 무대가 시작되고 나는 한눈에 반했다. ‘이런 게 대학생이구나!’ 옆에 앉은 친구 눈치를 보며 리액션 호흡을 맞추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맨 앞줄에서 건반 언니를 보며 열광하고 있었다.
‘샌페 키보드 언니’에게 푹 빠진 채로 집에 돌아오니 아빠가 신문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가 너네 단과대 밴드라는데?” 샌드페블즈 40주년 기념 콘서트 기사였다. 제1회 대학가요제 우승을 안겨 준 〈나 어떡해〉 덕분에 샌드페블즈는 강산이 변한 뒤에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실력도 좋은데, 유명하기까지 하다니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샌페’ 오디션을 보러 갔다. 사진 동아리 ‘녹영’ 선배에게 밥도 얻어먹었지만, 사진전보다는 새터 무대가 더 멋있어 보였다. 열 살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체르니 40을 맛보긴 했지만, 그 뒤로 십 년 동안 피아노는 안중에도 없던 터였다. 사십 년 전통을 가진 밴드에서 연주 실력보다 성실함을 높이 사주신 덕분에, 오디션에 합격하고 샌페 40대 키보드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1기, 2기라고 부르지 않고 1대, 2대라고 불렀다.)
지하 2층 주차장에 마련된 연습실 벽 한 켠에는 가훈이 붙어있었다. ‘우리는 가족이다’. 첫 한 달 동안에는 이 말이 현실이 될 줄 몰랐다. ‘당대’가 된 4월부터 학기 중에는 월화수목금 저녁 세 시간, 방학 중에는 월화수목금 여덟 시간씩 일 년 동안 혹독한 연습이 이어졌다. 중고등학생 시절 내내 도서관 책상에 앉아서 얻었던 끈기가 지하실 건반 앞에서 빛을 발했다.
거기에 선배님들이 연습실을 방문하실 때면 뒤풀이 술자리까지 밤새 이어지기 일쑤였다.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과 술자리가 얼마나 즐거운지, 사십 년 넘게 이어온 전통이 어떻게 세대 차이를 줄여주는지 배웠다. 밖에서 우릴 보고 ‘농생대 샌페과’라 할 정도로 함께 보낸 물리적 시간이 길었던 덕분에 40대 멤버들은 물론 선배, 후배들과 진짜 식구, 가족이 되었다.
일 년 당대 생활과 일 년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꼬박 두 해를 지하 2층에 바치고 나니, 과에서 내 별명이 ‘유지하’가 되었다. 지하 2층 붙박이로 지내는 동안 단순히 연주 실력만 키운 것은 아니다. 음악을 들을 때 노래 가사뿐만 아니라 드럼, 기타, 베이스, 건반 등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동아리 회장을 하면서 서류를 작성하고, 행사 총괄을 맡으며 준비하고 기획하는 법을 배웠다. 학과 사무실 선생님(행정 실세)께 인사를 열심히 드리니 동아리 행사를 할 때 수월한 면이 있었다. 사십 년 전에 이 동아리를 만드신 선배님들과 함께 공연을 하면서 사회생활하는 법도 익혔다.
삼십 분 공연을 위해 몇백 시간을 바쳐야 하는지, 실전에서 100%를 보여주려면 연습에서는 120% 준비해야 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의 위트와 임기응변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기에 아무리 작은 공연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연습 마치고 뒤늦게 과 술자리에 가려는 내게 2차, 3차 이동할 때마다 내게 연락을 주는 과대표에게서 리더의 배려를 배웠고, 아마추어 공연에도 꽃다발을 준비하는 친구에게서 위대한 우정을 배웠다. 대학 강의실 밖에서 얻은 경험이 내 손과 발, 귀와 입, 몸과 마음에 스며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