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인 건 차분하게 생각하는 거고 감성적인 건, 아 있지! 막 눈물부터 나고 그런 거야."
"아~ 뭐가 더 좋은 거야? 난 눈물 나."
"더 좋은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어떤지 알아보는 거야. 난 이성적이거든. 넌 감성적인 거야."
으앙. 어떻게 고민하는 시간도 없이 바로 '차분한 생각'과 '눈물부터 나는'이라는 최적의 표현을 바로 말할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며 이성적인 아가는 은박 속마개를 막 뜯은 케첩 짜듯 막힘없는 해설을 이어갔다.
막 눈물부터 나는 인간인 나는, 아가들의 귀여운 대화에서 또 배운다. 단순하고 쉬운 한마디로 표현하기. 나를 위한 문장 말고 읽는 이가 '아~' 할 수 있는 문장을 쓰기. 감성적 인간에게 '짧게'는 어렵다 휴.
스승님들 가시고 테이블을 닦으며 분홍색 산리오 책을 정돈하는데, 핫핑크 뮤직비디오가 인기인 로제와 부르노 마스의 '아파트'가 흘러나온다. 으앙. 책도 노래도 다 귀여워! 아파트 아파트~ 들썩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이응이응 작전을 기억한다. 오늘은 꼭 성공해야지!
어린이들이 읽던 심리 테스트집을 좋아하시는 어르신 고객님. 느리고 여유 있는 걸음으로 서너 달에 한번 정도 입장하신다. 초록 대파 묶음이 솟아오른 빨간 장바구니 캐리어를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세워 두시고 천천히 말씀하신다.
"아메리카노 한잔, 따뜻하게 줘요."
책들 틈에서 분홍 책을 꺼내신다.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페이지, 오른쪽 페이지. 뽀로로 만화에 흠뻑 빠졌던 시현이, 준우의 아가 때처럼 입가에 미소를 품고 아메리카노와 책을 음미하신다. 페이지마다 오래 머무르신다.
봄인가 한 번은 '이게 난 재미있더라. 지나가다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면 들어오는 거야. 가끔 와서 보면 난 이게 참 재밌어.' 하셨었다. 쿠로미, 마이멜로디, 시나모롤, 또 다른 산리오 친구들 사이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귀여우신 고객님 모습이 새겨진다. 오늘은 캐럴을 틀어볼까.
"기분이 꿀꿀해서 좀 풀어보려고 이거 마시러 왔어. 내가 마시던 것 좀."
단발 웨이브 머리에 살짝 비음이 섞인 애교 음성의 고객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마시던 것'은 블랙펄을 넣은 미지근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이다. 외모는 50대 정도이실 것 같으나 고객님의 너그럽고 편한 대화법은 60대 이상이라고 힌트를 준다. 올초부터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오시기 시작했는데, 첫 만남 때부터 늘 만나오던 이모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보통 몇 마디 말을 거신 뒤, 조용히 그리고 정말 행복하게 음료를 비운신다. '오늘 덥고 바빠서 힘들었는데 피곤이 싹 녹았다'하시며친절한 구매 후기를 남겨주시는 다정한 분.
통화가 길어지신다. 기분이 꿀꿀한 이유가 담긴 통화인 것 같아 최대한 멀리 떨어져 설거지를 반복했다.
"동상, 알겠는데 내가 이제 버스 타야 해서."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컵을 카운터에 올려두신다. 통화 중이어서 말을 못 한다는 표정으로 끄덕이시고, 손가락 브이로 작별인사를 하셨다.
으앙. 나가시다 말고 돌아서셔서 '엄지 척'을 도장 찍듯 꽝꽝 두 번 흔들고 가신다. 이 '엄지 척'에 또 와르르 작전이 무너진다. 항복하겠습니다!
고객님 엄지 척 공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는 그만, 블루베리 베이글을 사러 들른 바로 옆 파리바게트에서 단발 웨이브 고객님으로 빙의하고 만다.
"업?" (그럼 음료 사이즈는 뭘로 할까? 기본, 사이즈업, 더블사이즈업 중 골라 줄래? 네 조언이 필요해.)
"펄췁초코!" (그럼 친구야, 타피오카 펄을 추가하고 사이즈도 한번 올린 중간 사이즈 초코 버블티를 먹어 보는 건 어떨까?")
"더블펄, 예스!" (나는 블랙펄을 좋아하니까 한번 더 추가해서 더블 블랙펄 옵션도 선택할게. 도와줘서 고맙다. 함께이니 좋다 친구야!)
"새끼, 말 많네." (우린 말없이도 통하는 친구 사이잖아. 네가 있어 나도 고맙다 친구야.)
뜨거운 우정이 함축된 대화를 들으며 웃음이 터지려 한다. 콧바람이 새어나와 콧구멍이 양옆으로 벌어진다.마스크 뚫고 나올라. 입술을 꽉 오므리며 콧볼 확장을 막아본다. 거센 호흡을 삼키느라 눈도 꽉 감긴다. 으앙. 너무 귀엽잖아. 친구들에게 배운 가사로 방구석 래퍼가 되어 볼까.(손 머리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