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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별 Oct 21. 2024

으앗

망상

 "안녕하세요!"


 유치원 하원 때 들르다 초등학생 형아가 된 아가. 전보다 목소리를 굵고 크게 내며 인사한다. 아직 용돈 대신 엄카(엄마 카드)를 쓰지만, 형님답게 혼자서도 들른다. 휴가를 다녀왔는지 놀이터에서 뛰다 왔는지 불씨 머금은 숯처럼 붉고 검다. 다부진 뱃살이 돋보이는 얇은 원단의 회색 티셔츠는 딱 올여름까지만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땀에 젖은 곳과 마른 곳의 경계가 명확해 마치 지도처럼 보인다. 오늘은 친구와 함께네!

 “야 뭐 먹을 거야?”

 우렁찬 복식 발성에 티셔츠의 회색 산맥이 출렁인다.

 “나 안 먹어.”

 “왜 안 먹어? 그럼 왜 왔어?”

 “그냥 안 먹을래.”

 “야 너 안 먹으면 내가 엄마한테 혼나잖아. 아무 거라도 먹어. 내 맘대로 산다.”     


 으앗. 너무 귀엽잖아. 급히 머리 감고 달려 나온 사람처럼 굵은 땀을 줄줄 흘리며 친구에게 단호하게 '엄마한테 혼나니 뭐라도 먹어'라니. 커다란 책가방을 멨지만 유치원 가방 옆에 두고 마시던 타로 버블티를 주문하며, 안 먹겠다는 친구 몫으로 마카롱 하나를 패기 있게 주문한다.


 5년 차에 접어든 가게가 여전히 즐거운 것은, 상상이 취미이자 적성인 덕도 있다. 고객님들께 호기심으로 개인적인 일을 묻는 일은 거의 없다. 꼭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 아니라는 , 동네 작은 가게 사장으로서 살아남기에 적절하다고 느낀다.

 묻기를 기다리실 때에는 묻지만(스몰토크를 원하실 때가 있다. 자랑, 하소연, 수다, 외로움, 아픔, 도전 등의 사연으로.) 그 외에는 귀여운 장면 뒤 혼자 망상에 빠진다. '으앗 귀여워.'로 채워지는 작은 가게는 작은 상상 읽기요 상상 쓰기이다.


 '으앗' 담긴 음료와 마카롱을 건넨 뒤, '친구가 아무것도 안 먹으면 엄마께 혼나는 이유'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친구가 전에 사준 것이 있어 이번에 갚으라고 엄마가 카드를 주셨을까. 오늘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혼자만 사 먹으면 혼나는 걸까. 평범한가. 그럼 다시. 그동안 외동으로 보였으나 실은 집돌이 쌍둥이 동생이 있었던 것일까. 간만의 외출에 동생도 꼭 사 먹이라고 신신당부한 엄마의 말이 생각나 뭐든 먹으라고 무섭게 말한 것일지도. 아닌가. 우리 준우처럼 엄마가 늦게 퇴근하는 이웃집 친구인가. 그래서 혼자 먹지 말고 친구 몫도 꼭 챙기라고 한 것일까. 아니면 실은 엄마가 큰 도움을 받은 친구네 아들이라 이렇게라도 신세를 갚아야지 하는 마음에 음료를 사 먹이라고 보낸 걸까.


 진지하게 지어내기에 몰입할 즈음 바쁜 시간이 찾아오고 망상 서랍을 닫는다.


 작은 가게에는 ‘으앗’을 불어 일으키는 일이 가득이다. 귀여운 키링, 귀여운 티셔츠, 귀여운 수면 바지, 귀여운 백팩, 귀여운 성적표, 귀여운 안경, 귀여운 미소, 귀여운 대화, 귀여운 다툼, 귀여운 질문, 귀여운 발뒤꿈치. 귀여운 뻗침 머리, 귀여운 삭발. 귀여운 사과, 귀여운 분실물, 귀여운 실수.

 

 갓 파마한 듯한 장발 곱슬머리에 해리포터 안경을 쓴 야무진 아가의 질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여기 처음인데요. 미술 학원 친구 소개로 왔어요. 여기에서 초등생 사이에 제일 인기 있는 메뉴가 뭔가요?”

 인터뷰 온 기자처럼 또박또박 명료한 발음으로 질문했다. 으앗. 귀여워라. '인기 있는 메뉴 다 드려볼게요.' 하며 전메뉴를 선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귀여운 아가의 미래에 종이인형 옷 입히듯 다양한 역할을 올려본다.


 여름 방학식이 있던 날, 엄마표 정성 돈가스에 쭉 늘어지는 치즈 올려 꼭꼭 씹어 먹고 나왔을 것처럼 새하얀 친구가 입장했다. 초코 버블티를 매장식으로 주문하여 오래 앉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저 다음 주에 제주도 가거든요’, ‘지금 피아노 다녀왔고 이제 여기서 조금 놀다가 영어 가는데 숙제를 다 못했거든요.', '전에 제 짝꿍이 국어 시간에 장난치다가 혼났는데요.', 이런 순간에는 망상 대신 대화가 필요하다.  

 "아 숙제가 많은가 봐요. 지금 몇 학년인가요?"

 스몰토크를 위해 나이를 물었더니, 아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는 이제 1학년 2학기이니 거의 2학년이죠."


 으앗. 귀여워서 넘어질 뻔했다. '거의'가 이렇게 귀여운 단어였구나. 여름 방학은 물론이고 2학기와 겨울방학까지 단번에 뛰어넘는 치명적 받아 올림에 반해 온종일 '거의'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이제 개업 4년 5개월째에 접어드니 거의 베테랑 사장인 셈이고, 나는 이제 44세이니 거의 50대인 셈이다. 나는 이제 3번째 브런치 공모전에 도전할 예정이니 거의 데뷔 작가인 것이다. '거의'를 넣으니 이루지 못할 것이 없잖아.

 1학년(2학년이나 다름 없는) 아가에게 진정한 시크릿 마인드를 배웠다.      

  

 어제 한 아가가 막 삶아낸 타피오카펄이라 살짝 따뜻할 수 있다는 안내에 눈을 크게 뜨며

 "펄을 삶는 거였어요? 달걀처럼요? 그럼 이게 삶은 달걀 같은 거예요?"


 이 귀여운 대사에 이응이응 작전은 또 잊고 새 망상 중이다. 픽업대에서 음료를 전하는 내 모습.

 "고객님 주문하신 반숙 블랙펄 넣은 토피넛 버블티 나왔습니다. 완숙 얼그레이도 드릴게요. "     

 펄펄 20분 끓이고 40분 뜸 들인 후 꺼낸 타피오카 펄처럼 내 머릿속은 망상으로 늘 뜨끈하다.


 상상 그리고 망상. 어쨌든 이응이응이다.


일주일 망상 소재가 되었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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