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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별 Oct 21. 2024

아악

허세

 "야! 나 믿고 한 번만 시켜봐. 나 못 믿어?"


 '얘도 참.' 하는듯한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다이소 쇼핑백, 드림디포(문구점) 비닐을 내려놓으신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친구 곁으로 다가와 거침없이 키오스크를 누르신다. 형광 민트 곱창 밴드로 정수리까지 올려 묶은 똥머리 덕인지 그 손놀림이 더욱 도도하게 느껴진다. 내 입맛에는 오답이 없다는 자신감으로 턱을 세우며 본인만의 커스텀 음료를 무조건 추천.

 아악! 선택불가증후군을 달고 사는 내향 망상인으로서 초등학생 고객님의 추진력 있는 리더십에 경의 탄사가 터진다.


 작은 가게는 귀여운 허세가 피어나는 공간이다.


 고객님의 '나 못 믿어?'에 누가 되지 않도록 복숭아 아이스티 파우더를 더 열심히 저어 본다. 컵을 꺼내 고객님의 커스텀 항목인 타피오카펄을 한 국자 곱게 담는다. 얼음을 넣고 그 위로 녹인 아이스티를 붓는다. 다시 는다.

 "음료 나왔습니다. 드셔 보시고 혹시 입에 안 맞으시면 말씀 주세요. 원하시는 메뉴로 바꿔 드릴게요!"


 아이돌 포카(포토카드)를 교환하며 올림머리, 단발머리, 긴 웨이브 머리의 고객님들 수다가 시작된다. 단발 아가는 주로 듣는 역할이고 나머지 두 친구가 주로 대화를 나눈다.


 "야 이거 맛있는데?"

 "그렇다니까! 나 믿고 시키라고 했잖아."

 "근데 이거 약간 아메리카노 색깔이다. 커피인 줄"

 "그래! 그래서(다리를 꼬며) 난 이거 약간 어른 느낌 내고 싶을 때 먹는다니까!"


 으악. 어른 기분 내고 싶을 때 마시는 음료였다니. 펄 추가 아이스티가 달리 보인다. 아이스티 원샷으로 어른 느낌에 한껏 심취한 아가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너 어떤 친구 싫어해?"

 "약간('약간'이 꼭 들어가야 한다. 막 립밤과 핸드크림을 구입하기 시작한 초등 여학생들의 대화에는.) 잘난 척하고 허세 부리는 애들 싫더라."

 "야 나도 그런 애들 진짜 싫어해. 얘 나랑 똑같네."

 주문받고 음료 만들고 설거지하고 정리하는 사이사이 교우 관계 이야기나 들리나 싶더니 갑자기 주제가 바뀌어있다.  


 "야 우리 아빠 OO 다녀~"

 "야 우리 아빠는 OO 다닌다~!"

 "너 재용이 형 몰라? 재용이 형이 최고지!"

 "참 너 카리나 몰라? 카리나가 최고야~"

 "우리 아빠는 전국 매출 1위 할 수도 있어. 팀장님이야!"

 재용이 형과 카리나, 두 등장인물이 아가들 아버님 회사와 관련 있는 인물인 듯하다. 조금 전 대화에 등장하던 '허세'와 '잘난 척'이 떠올라 악 귀엽다. 고객님 지금 '약간' 허세 대화 아니십니까! 이러다 우리 남편 회사도 물으시는 건 아닌가 긴장했으나, 다행히 묻지 않으셨다.


 옷을 뚫고 나오려는 근육에 비해 음료컵이 너무 작아 보이는 분들의 허세도 귀여움 배틀에서 상위권이다.

 이웃 헬스장 관장님께서 방문객들을 위한 손가락 펀치 장난감을 선물해 주셨다. '아이고 왜요. 받기 죄송한데요. 재미있으면 제가 사서 준비해 둘게요.' 말씀드리며 거절했다. 그러자 관장님이 씩 웃으며 말씀하셨다.

 "저희는 해봐야 만점만 나와서요."

 아악. 999 만점만 나와서 재미없다 하시는데 안 받을 수가.


 누군가 손가락 펀치를 테이블에 올리면, 관장님 말씀을 전하는 상상을 한다.

 "저~기 헬스장 관장님께서 할 때마다 만점만 나오는 바람에 시시하다고 주셨어요. 고객님 지금 만점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만점 아니면 OO헬스로 고고! 999점 도전!"

 (다른 헬스장 관장님께서 그 게임을 몇 번 하시더니, '이건 성인 남성이라면 그냥 가볍게 만점이 나와야 한다.' 하셨다. 아악!)


 허세 중 내 마음속 1위는 단연코 남학생들의 '누가 누가 더 심한가' 허세 만담이다.


 "야 나 살쪘다. 이제 칠십이야."

 "나는 진작에 팔십오 찍었다. 자랑하냐?"

 (아악)

 "나 과학 7등급이야. 부럽냐?"

 "난 국어 내 뒤에 12명 있다. 전교에서. 웃기냐?"

 (아악아악)

 "아 이제 이번달 용돈 만천 원 남았어. OO(된소리라 이응이응으로 대신)."

 "나는 한 달 용돈 이틀 만에 다 썼다. 새끼 놀리냐?"

 (아악악)

 "우리 엄마 성적 보고 안 준대."

 "야 우리 엄마는 얼굴 어쩔 거냐던데. 그러다 갑자기 아빠한테 화내고. 나 결혼 못하면 어쩔 거냐고. 미친다 진짜."

 (아아악)

 "오늘 피시방에서 4시간 있을 거라 더블 사이즈업 샀다."

 "OOO아('미치광이'를 욕하여 이르는 말, 맥락 없는 욕으로 애정 표현을 하는 나이), 난 12시간도 있어 봤다. 4시간 장난이냐!"

 (아아아악)


 '저요!' 하며 손 들고 싶어지는 날도 있다. 굳은 다짐을 지키지 못한 분들의 '작심삼일 허세 마당'이 벌어지면, 새로운 시즌의 티니핑 인형을 발견한 아가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제부터 다이어트 시작했는데, 좀 전에 참치 김밥 2개에 라면에 닭꼬치에 사이다 먹었다."

  "핸드폰 안 보고 공부하려고 폰 안 꺼냈는데, 노트북 강의 보다가 유튜브만 OO('매우'를 의미하는 남고생의 단어) 봤다."

  "걔한테 절대 전화 안 하려고 차단도 했었는데, 차단 풀고 연락했다."

 

 나도 이 전쟁에서만큼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글 쓰겠다는 결심한 지 벌써 4년이 되었는데  다짐만 하고 있다고 나보다 더 심한 사람 있냐고 으스대는 망상에 잠긴다. 아아악. 모두 날 존경하겠지!

 

 분명 허세 부린 건데 왜 어깨에 힘이 빠지는 걸까.

만점만 나와서 게임이 시시한 관장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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