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주 6일 임신중독증 진단, 지금 낳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다
2021년 7월, 대학에서부터 8년간 연애했던 남편과 결혼했다. 신혼집에서 알콩달콩 재밌게 살았다. 그런데 1년 뒤, 난임 판정을 받았다. 젊은 나이었지만, 시험관 시술을 받아야 했다. 힘든 날이 많았지만 아기를 생각하며 견뎠다. 다행히 시험관 1차에서 귀한 아기를 얻었다. 행복하게 아기를 기다리던 그때, 전셋집 계약은 끝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연장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집주인은 집을 직접 쓰고 싶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임신한 몸으로 부랴부랴 이사갈 집을 알아보았다. 겨우 예산에 맞는 괜찮은 집을 구했는데 대출 계약이 꼬이는 등 스트레스가 심했다. 다행히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 이사 전날(2023.2.19.) 돈을 아끼기 위해 이사 청소는 남편과 내가 직접 했다. 고맙게도 친정 식구들이 도와주러 왔다. 싱크대 선반을 닦고 있는데 동생이 말했다.
“언니, 발 부었다.”
청소를 끝내고 거실에 앉아서 보니 정말 그랬다. ‘몸이 부으면 임신중독증이라던데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눌렀다. 그때는 임신중독증이 어떤 병인지 전혀 몰랐다. 청소를 마치고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짐정리를 남편에게 맡기고 잠이 들었다.
포장이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집이 굉장히 넓어졌다. 아기방으로 정해둔 방에 미리 준비한 침대, 모빌과 바운서 등 아기 물건들이 들어갔다. 이제 아기방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설렜다. 부기는 여전했고 두통도 굉장히 심했다. 그래도 가장 스트레스 받던 집 문제가 해결되어 기뻤다. 불안한 생각은 하루 더 누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길어진 동선에 발이 아프다며 남편과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출근일이 아니었지만 혼자 병원에 가기가 무서웠다. 남편이 퇴근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5시쯤 함께 산부인과에 갔다. 가자마자 당연하게 혈압을 재었는데 최고혈압이 174가 나왔다. 2번을 다시 쟀지만 169, 183이었다. 로비에 대기하는 다른 산모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남편과 한참을 앉아서 기다렸다. 간호사님들이 수군대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게 느껴졌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그동안 눌러왔던 불안함이 터져 나왔다.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때 갑자기 뱃속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기는 뱃속에서 잘 지내고 있는 듯 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한참을 기다린 뒤,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위험하다고 하시며 말씀하셨다.
"지금 당장 대학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기다릴 때는 담담하게 울던 나를 달래주던 남편이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는 울었다.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간호사로 일하는 동생이 K대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K대병원 응급실로 바로 갔다. 응급실에서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 수액을 꽂고 침대에 누운 채로 분만실로 옮겨졌다. 설마 이대로 오늘 낳는 걸까 무서웠다. 옮겨주시는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모르겠다고 하셨다.
대학병원 분만실 내에는 분만실 외에도 처치실, 고위험산모병실, 간호사실 등 또 하나의 작은 병원이 있었다. 교수님께 진료를 받으며 혈압을 다시 재니 198/131이 나왔다. 아기는 580g이었다. 24주가 아니라 34주였으면 당장 낳았을 거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 아기는 너무 작아서 일단 최대한 끌어보겠다고 병원 오셨으니까 치료는 의료진이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교수님이 남편에게 이런 혈압 본 적 있냐며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남편이 또 울었는데 교수님은 단호했다.
“지금 엄마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엄마는 울어도 되는데 아빠는 지금부터 울면 안 돼.”
코로나 PCR 검사 결과가 나와야 입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분만실 내에 있는 가족분만실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여기저기 연락을 했다. 친정, 시댁, 예배 반주자였기 때문에 교회에도 빨리 연락을 해야 했다.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사단체 간사님은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와 주셨다. 나는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만 만나고 가셔야 했다. 정신이 없어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저녁을 걸렀을 것을 걱정해 저녁 식사와 돈을 주고 가셨다.
혈압약 주사를 4번이나 맞았는데도 혈압이 내리지 않았다. 계속 170을 웃돌았다. 임신중독증은 혈압이 높아지고 단백뇨가 나오는 것이라 들었다. 간호사 선생님께 단백뇨 수치를 여쭤보았다. 정상적인 단백뇨 수치는 마이너스가 나와야 하는데 나는 3 positive라고 하셨다. 개그맨 이수근 씨의 아내가 임신중독증으로 신장에 문제가 생겨 투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동안 내 몸이 버텨준 게 감사했다. 혈압이 이렇게 높았는데 혈관이 터지지 않고 경기 한 번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싶었다. 지방의 도시 외곽에 사는데도 인근에 신생아중환자실이 있는 병원이 3개나 있어 금방 병원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참 다행이었다.
남편을 쳐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이러다 내가 잘못되면 저 사람은 어쩌나’ 싶었다. 갑자기 아내도 기다리던 아기도 잃고 혼자가 되겠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내 위기가 나 혼자만의 위기가 아니다. 남편도 나를 보고 말했다.
“니 이제 입원하면 그 큰 집에 내 혼자 있나…….”
이사한 지 하루 만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남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집뿐 아니라 학교도 근무지도 이동했던 나는 처리해야 할 것이 더 많았다. 그간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드디어 신혼집이 있는 지역으로 전입해 와서 새 학교로 근무지가 정해진 차였다. 학교의 짐을 새 교실에 넣어두고 3월을 준비하며 단 이틀 새 학교에 출근했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교사들은 보통 3월 1일 자로 발령을 받는다. 기존 학교에서 종업식을 마친 이후로 새학교에 출근했지만, 전산상으로는 전임지에 근무 중인 상태였다. 병가처리를 위해서는 이전 학교 관리자와 새 학교 관리자 모두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이야기는 커녕 생각도 하기 싫은데 2번이나 직장에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게 버겁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교감선생님들께 전화를 드렸다. 씩씩하게 전화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울면서 전화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멀쩡히 잘 있다가도 눈물이 났다. 전임지, 현임지 교감선생님들은 모두 여자분이셨다. 길게 설명드리지 않아도 이 주수에 출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일이고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 아셨다. 임신과 출산을 먼저 겪으신 어른들이 걱정하고 위로해 주셔서 참 많이 감사했다.
3,4월을 병가처리 하기로 하고, 준비 중이라 짐이 정리되지 않은 교실은 남편이 가서 치우기로 했다. 부부교사라는 점은 이럴 때 참 편하다. 3,4월을 버틸 수 있을까……. 목표는 그저 오늘보다는 하루만 더.
정신을 좀 차리니 병원에서 맞는 첫 아침이 사순절인 것이 감사했다. 병실에서 유튜브로 사순절 1일 차 기도영상을 보며 혼자만의 기도회를 했다. 1차 목표를 부활절로 세워보았다. 그럼 32주에 가까워진다. 욕심인 걸 알고 있다. 28주만 넘겼으면, 1kg만 넘겼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계속 하루만 더, 일주일만 더 하며 정상출산을 바라게 됐다.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친정엄마와 가족들이 기도 부탁을 여기저기 얼마나 했는지 누가 기도해 준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엄마는 “노아(태명)가 큰 사람이 되려나 보다.”라고 말했다. 오만 사람 기도받고 태어난다고. 시댁 식구들도 보낸 기도 제목을 여러 곳에 공유해 주신 듯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창세기 6장 8절”
말씀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보다는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약 없는 입원생활이 시작되었다.
* 안녕하세요. 첫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쓰고 있습니다. 현재는 엄마와 아이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아이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두고 싶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교대에서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여 부부 초등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저는 현재 육아휴직 중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나 글에 종종 언급될 것 같아 간단히 소개합니다.
제가 이 모든 일을 겪을 때 같은 일을 겪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참 절실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연이 이야기는 매주 월, 목 연재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