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 젖은 기억

커피, 벤치, 기다림 - 외할아버지와 믹스커피

by 몽글포실냔냐

커튼 뒤로 햇살이 들어와 눈을 떴다.

오늘은 왜인지 몸살 인 것 같기도 하고 일어나려니 몸이 아주 찌뿌둥하다.

평소처럼 체조를 하고 아침을 시작하려 했지만 팔이 잘 올라가지 않는다.

에이.. 그만 두고 모닝 커피.. 모닝 커피를 마셔야 할텐데.. 이 사람은 대낮부터 어디를 간게야?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탁! 물이 끓자마자 커피 포트와 머그잔을 들고 마당으로 나가기로 한다.

대문 앞 담벼락에는 내가 직접 만든 나무 의자가 있다.

이 집도 내가 직접 만들었다.

집을 지었던 시기는 큰 딸이 첫째로 딸을 낳았을 무렵이었다.

나랑 집사람은 이 집을 짓느라 첫 출산을 한 큰 딸 산후 조리는 못해줬는데 집사람은 내심 그게 미안한지 집이 다 지어지고 나서 큰 딸을 집으로 불러 자주 밥을 해먹이고 있다.

아기를 낳고 마른 큰 딸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며..



우리 집 사람은 시집을 와가지고 왠병 딸만 내리 둘을 낳았다.

큰 딸을 낳았을 때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첫 손주라며 집사람에게 젖도 제대로 못 물리게 하고 어머니가 따뜻한 아랫목에 아기를 빼앗아 가듯 해서 데리고 키웠다.

부엌에서 젖을 말리며 끅끅 울고 있는 네가 너무 답답해서 나는 말했다..

‘왜 그까지것 가지고 울어!! 그만 안울어?’

그런데 너는 둘째를 또 딸을 낳는 바람에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그야 말로 집안의 구박데기가 되어버렸다.

집사람이 소처럼 어머니에게 맞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왜 그런지 화가 났다.

소처럼 미련하게 맞고만 있는 너에게 화가 난 것일까?

네가 맞고만 있는데 아무 말도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일까?

화가 난 나는 너에게 온갖 몹쓸 말과 모진 매로 화풀이를 했다.

계속된 시집살이를 아무 말도 없이 견뎌내는 너를 보며

동네 사람들이 ‘도망가지 도망가지 왜 살아’하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도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네가 도망가버릴까봐 어머니가 오시기 힘든 먼 곳 파주로 근무처를 이동했다.

너는 모르겠지..

미군들과 몇마디씩 주고받으며 밤마다 파티를 즐기던 이곳을 떠나

파주 부대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얼마나 시퍼렇게 힘들고 낯선 곳이었는지..

그래도 고맙게도 그곳에서 너는 큰 아들과, 쌍둥이 아들들을 낳았다.

그리고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


그래.. 난 이 곳이, 내가 지은 이 집이 좋아.

그런데 의자는 왜 이렇게 덜그럭 거리는 거야?

어디 못이 빠졌나?? 평소에 나라면 재빨리 고치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왠지 그럴 힘이 없다.

에이.. 나중에,,

얼마 전 내린 비에 이끼가 담벼락에 이리도 많이 피었나?? 오늘따라 이끼가 낀 담이 낮설다..



참! 커피를..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커피는 안가지고 나왔네..

다시 커피를 가지고 나오기로 한다.

믹스커피를 박스째로 들고 다시 담벼락 앞 벤치에 앉았다.

햇살이 담장을 타고 흐른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탔다.

믹스커피 봉지를 반으로 접어 커피를 휘휘 저었다.

아 이놈의 커피는 왜 이리 맛있냐.. 작게 중얼거리다가 또 다른 커피 봉지를 뜯는다.

방금 마신 걸 잊고 또 타고, 또 마신다.

그러다 문득 또 생각난다.


‘커피 내놔’ 하면 말 없이 커피를 타서 주는 너.

뜨겁게도 차갑게도 말고 딱 좋아하는 온도로 말없이 커피를 건내는 너.

벤치에 놓인 커피포트의 물이 식은 것도 모른채 설탕은 왜 이렇게 안 녹냐며 투정도 부려본다.

투정을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 투정할 맛도 안난다.

이 여편네 아침부터 어디를 싸돌아 다니는거야?

문득.. 정말로 도망가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 이 커피가 뭐라고 내가 타마시면 될 것을,,

집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면 어디에 갔었냐고 화가 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런 기분을 내가 언제 느껴봤던가..




“할아버지!”

왠 아가씨가 나를 부른다.

종이컵을 꼭 쥔 내 두 손이 고사리 같다.

푸른 고사리 잎이 아니라 말린 고사리 줄기..

그런데 아가씨가 참 예쁘기도 하지.



“할아버지! 추운데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저 혜미에요.”

“에? 네가 혜미라고? 니가 언제 이렇게 컸냐?”

그 고사리 같은 손을 하고 방긋 방긋 웃던 손녀딸이 갑자기 아가씨가 되어 나타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혜미야, 네가 언제 이렇게 컸냐? 근데 네 외할머니 어디 간겨??”

“할아버지 할머니 지금 대장암 치료하시느라 병원에 입원해 계시잖아요. 할아버지 같이 집으로 들어가요.”

에? 대장암? 언제부터 그 사람이..



자식들이 다 설명했지만 그는 다 잊었다.

다만 집사람이 없다는 것 만큼은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집 밖에서 기다린다.

이제 돌아오면 커피 한잔 타주고 싶어 믹스커피를 박스로 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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