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20년
"아빠는 스무 살에 뭐했어?"
여름 방학 중에 집에 와 있는 아들이 물었다.
그는 갓 스무 살이 되었다.
"글쎄, 스무 살 때 뭐했지?"
오른 손으로 턱을 감아쥐었다.
나의 20년---.
"커피를 알았고 / 낭만을 찾던 / 스무 살 시절에 / 나는 사랑했네."
가수 장계현은 그의 20년을 커피, 낭만, 그리고 사랑으로 노래했다.
그것들은 때론 쓴 맛으로, 때론 달달한 느낌으로 나에게도 존재했다.
나의 20년은 어땠던가.
5·18을 겪으며 2학기 연속 쌍권총(F 학점)을 찼다.
학교 정문 앞은 어제 쏜 최루탄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는 적대적 에너지가 천지에 가득하다.
교문을 들어서다 말고 발길을 돌려 학교 앞 오른쪽 2층 건물 다방으로 올라간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같은 또래의 다방 여종업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낡은 가죽 소파에 앉아 계란 띄운 쌍화차를 주문한다.
그녀는 의례 두 잔을 가져와 한 잔은 내 앞에 놓고 다른 한 잔은 오른 손에 들고 마주앉는다.
달고 쓴 쌍화차에 쓰잘데기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대가 주는 우울함을 털어낸다.
오후 수업 역시 빠지고 시내로 향한다.
금남로 10층 당구장에 올라가면 젊은 여사장이 어서 오라며 반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당구장 직원들은 뒷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사장이 밥 먹으라며 방으로 끌고 간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 직원들과 구수한 김치찌게를 함께 했다.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지역 프로야구팀의 유명한 야구선수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타율 높은 상위 타선의 인기 타자들로 함께 게임할 사람을 찾았다.
우리는 2 대 2로 편을 짜서 겐뺑(게임비 내기)이를 쳤다.
그 둘은 9회말 투아웃 만루에 나선 타자처럼 게임에 매우 진지했다.
1 대 1로 비기다가 결승에서 우리가 2:1로 졌다.
게임비는 당연히 우리 몫이다.
다음에 또 보자며 그들은 악수를 건네고 당구장을 나섰다.
유명 타자들과 당구를 치고 악수를 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들이 가고 난 뒤 저 옆 당구대에서 누가 소리친다.
"쟤 500인데 300 놓고 친거야!"
저녁 7시가 되면 충장로 1가 지하의 막걸리 고고홀에서 밴드 뮤직을 연주한다.
금남로 1가의 관광호텔 2층 나이트클럽과 달리 이곳은 소주와 막걸리도 판다.
저녁 7시면 아직 손님이 없는 시간으로 우리가 한시간 동안 오프닝 연주를 했다.
대학생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밴드로 거의 공짜로 했다.
스피커를 밖으로 연결해서 밴드 음악을 내보내며 초저녁 손님을 유인한다.
우리는 The Knack의 My Sharona, Kiss의 Love Gun, Dire Straits의 Sultans of Swing 등을 연주했다.
리드 기타의 실력은 당시 최고였지만 나머지 맴버들의 실력은 그저 그랬다.
빠르고 비트있는 고고 음악과 홍키통키의 헤비메탈 음악으로 술손님을 유혹했다.
나의 20년은 혈관 속에 흐르는 집시의 피가 끄집는 대로 살았다.
돌이켜보니 베짱이처럼 산 것 같아 부끄럽다.
상처도 많았다.
"아빠는 지금의 너처럼 계획적으로 살지 못했어. 친구들과 놀고 다니느라 많은 것을 잃고 살았지."
아빠의 부족했던 스무 살 시절을 이야기 하며 아들을 치켜세웠다.
"그래?"
아들은 씨익 웃으며 제 방으로 들어간다.
"아빠는 스무 살에 뭐했어?"라는 아들의 질문은 내심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
아빠가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아들은 그의 스무 살에 미래 설계를 하고 그에 따라 하나하나 접근해 가고 있다.
그의 스무 살이 대견하다.
그는 아빠의 해외 근무 때문에 충칭에서 태어나 7년 만에 한국엘 왔다.
한국말도 서투른 채 입국해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한국 학생들로부터 따돌림도 받았다.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대학을 가면서 아들은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처음 했다.
충칭 프로축구팀의 한국인 감독의 아들이 강남의 어느 학교에서 학폭을 당해 미국으로 전학갔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들은 그 후유증 때문인지 지금도 대학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과 방을 같이 쓰지 못하고 독방을 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안고 산다.
묵묵히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다.
나름 성과도 쌓여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그를 위해 십자가 앞에 두 손을 모은다.
나와는 많이 다른 아들의 스무 살 시절을 감사하며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