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 공무원과 전화로 상담을 하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나 그래도 아는 게 꽤 많나 봐. 사람들이 내 말에 이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네."라고.. 굉장히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그땐 몰랐습니다.
방금도 지자체 공무원 상담을 하나 해치운 후 혼자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가, 옆자리에 서기관님이 보여서 농담 한마디 했습니다.
"서기관님, 저는 공무원 퇴직하더라도 걱정이 없어요. 컨설팅 회사 하나 차려서 지자체 공무원들 대상으로 상담하면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서기관님께서는 웃으시며 저보고 그러시더군요.
"그게 다 니가 공무원이니깐 들어주는 거야. 너가 퇴직해 봐, 누가 너의 말을 듣겠어. 허허."
저라는 개인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제 직위나 직급, 아니면 제 소속 기관을 보고 저의 말을 듣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요즘 "사무관님 진짜 많이 아시네요"란 이야기만 듣다가 뼈 때리는 조언을 들으니 속에서 쿵 하고 와닿는 게 있더라고요. 그동안 내가 너무 자만하고 있었구나, 공무원이란 껍데기를 벗으면 난 어떤 사람일까. 그때도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로 묻고 내 말을 경청하고 그럴까. 아니.. 겠지?
제가 교육홍보 사업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언론사나 기획회사 같은 곳에서 자신들이 하려는 교육홍보 사업에 대해 설명하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사업의 내용을 잘 이해할수록 검토도 긍정적으로 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깐요. 그중에 머리가 희끗하신 할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제가 공무원이 되기 한참 전에 이미 우리 부처 국장으로 정년퇴직하셨고, 그땐 사단법인 협회의 협회장이셨습니다.
협회가 교육사업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깐 이렇게 설명이라도 해보려고 협회장이 직접 저를 찾아오신 거였죠. 처음 한 두 번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퇴직하신 분이란 이유만으로 여러 번 만나는 것은 특혜처럼 보일 수 있어서 나중에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저희 과장님이나 국장님은 그분이랑 함께 일을 하셨었기 때문에 대하기 어려워하셨지만, 저에게 그분은 그냥 동네 할아버지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거절할 수 있었죠.
그분과 관련해서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전화로 제가 거절하더라도 막무가내로 찾아오시는 바람에 곤란해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또 그분이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1층으로 모시러 갔습니다. (공무원증이 없는 분이 청사에 출입하려면 공무원과 함께 들어와야 합니다)
그분을 모시고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한 주무관을 만났습니다. 주무관님은 너무나 반가워하며 그분의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나중에 주무관님께 들었는데 자기가 힘들 때 진정으로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되었던 국장님이라며 진짜 감사한 분이니 꼭 좀 잘 부탁드린다고 연신 저에게 꾸벅이셨죠.
알고 보니 그분은 우리 부처에서 직원들에게 존경받던 훌륭한 국장님이셨는데, 저는 그것도 모른 채 일반 민원인처럼 대했었던 것입니다. 그분도 특권을 바란 건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정 없는 후배에게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무원을 퇴직하고 정말 아무 권위가 없는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는 게 무서운 일인 것 같습니다.
여하튼 평소에도 저는 앞으로 공무원 퇴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선 저보고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왜 퇴직 걱정을 하냐고 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생각이 좀 다릅니다.
언제든 공무원을 그만두더라도 괜찮을 정도의 전문성을 갖춰야지 일을 하더라도 상사들의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저의 페이스에 맞춰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일을 더 신나게 하기 위해서 일을 그만두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사진: 분임 동기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