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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Jul 16. 2023

10년을 쓰던 귀마개를 버렸다

난 무던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아내는 나보고 무척 예민한 사람이란다. 잠도 아무 데서나 못 자고, 바깥에선 화장실 큰 일도 못 보는 걸 보고 놀랬단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 잘 때도 꼭 귀마개를 껴야만 하는 걸 보면 얄미울 정도란다. 그렇다. 난 잘 때도 내 귀 모양에 맞게 특수 제작된 귀마개(통칭 이어키퍼)를 껴야지만 잘 수 있다. 여행을 갈 때도 최우선 필수품으로 챙겼다.




원래부터 귀마개를 끼고 잔 것은 아니었다. 10년쯤 전 고시 공부를 할 때였다. 난 독서실이 아니라 집에서 공부했다. 집에서 공부하면 독서실 비용을 아낄 수도 있고, 옆자리 사람을 신경 쓸 필요도 없으며, 무엇보다 생리현상에서도 자유로운 이점이 있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내가 진짜 예민한 사람인가 싶다.


다만, 집에서 공부하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윗 집에 개가 하루종일 짖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다가 우연히 이어키퍼라는 귀마개를 알게 되었다. 보청기 회사에서 제작한 제품인데 개인의 귀 모양대로 본을 따서 실리콘으로 제작한 귀마개였다. 10만원 이상 하는 것으로 고시생이 지불하기에 비싼 가격이었지만, 효과도 좋고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길래 바로 구매했다. 낮에도 밤에도 하루종일 귀마개를 끼고 살았다. 결과적으로 합격을 했으니 본전은 뽑았다.




결혼 후 침실에서 아내가 내 귀마개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그게 뭐냐고. 난 내 귀마개와 함께 해온 소중한 추억을 설명했지만, 아내의 입장에선 귀 기름이 반질반질하게 껴가지고 싯누렇게 변색돼 손 대기도 싫은 실리콘 덩어리에 불과했다. 당장 버리라고 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지금도 귀마개가 없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다며 버텼다. 아내는 설득을 포기했고, 그 후로도 몇 년을 더 귀마개를 끼고 잤다.


얼마 전에 귀가 너무 간지러우면서 동시에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은 귀 안에 염증이 생겼다며 면봉으로 귀를 후비지 말라고 하셨다. 면봉을 쓰지 않는 나는 혹시 귀마개 때문일까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귀마개도 쓰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난 귀마개가 없으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으니깐 말이다.


며칠 동안은 귀에 약을 바르느라 귀마개를 하지 않고 잠을 잤다. 자리에 누웠을 땐 내가 잘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금방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내가 귀마개 없이 잘 잤다는 걸 믿지 못했다. 처음엔 어제 피곤해서 그랬나 보다 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귀마개가 없어도 자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10년 만에 깨달았다. 귀마개가 없어도 잠을 잘 수 있었구나. 자려고 누웠을 때 시험에 못 붙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한다고 잠을 설치지 않는다. 빨리 잠들어야 내일 공부할 수 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나 옆집 개 짖는 소리가 신경 쓰이다 못해 왜 세상은 나를 방해만 할까라며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일도 이젠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좀 바쁘고 어려운 자리에 왔다고 힘드니 어쩌니 해도, 고시생으로 지냈던 시절에 하등 비할 바가 못된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난 10년을 쓰던 귀마개를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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