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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May 31. 2019

42.195 마이런

우중주 / 雨中走 / 아식스 서울신문 하프 마라톤


 첫 하프 마라톤 참가 후 한 달이 조금 안돼 두 번째 대회에 나가게 됐다

그동안 상처 치료도 하고 지난 대회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생각하며 이번에는 어떻게 해 보겠다 와 같은 다짐을 새로 세우고 발을 다쳤기 때문에 장거리 달리기에 맞는 새 운동화도 구입하기로 했다

 일정 이상의 운동은 장비 빨 이라더니 달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 러닝화 나이키 줌 플라이 플라이니트

 


처음에 가지고 싶어 했던 운동화는 아쉽게도 전 사이즈 품절

웃돈을 주면 구할 수는 있다는데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2차 픽으로 구입했다

구입 일주일 후 하라주쿠 나이키에서 원하던 운동화를 발견하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어찌 됐던 새 러닝화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400km 정도가 운동화의 수명이라던데 계속 달리다 보면 또 사는 순간이 오겠지

대회를 다녀오면 늘 남편에게 했던 말이 있다

"내가 길에서 제일 후져"

운동복 새로 사달라고 몇 번이나 어필을 해 드디어 쇼츠도 새로 구입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땐 내가 얼마나 꾸준히 달릴지 자신이 없어 굳이 운동복과 준비품을 갖추지 않았었고 10km까지는 그럭저럭 불편함이 없어 동네 한 바퀴 뛰러 나갈 때와 똑같은 차림으로 나가 후딱 달리고 들어오곤 했지만 지난 대회를 계기로 모양새도 갖추기 시작했다

일단 몸에 닿는 모든 것을 줄이고 싶었다

달리기에선 100원짜리 동전도 무게가 느껴진다더니 펄럭이는 바지의 천 끝도 귀찮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대회일

나의 두 번째 하프 마라톤이 시작됐다



2019 아식스 서울신문 하프마라톤


                       


 



월드컵 공원에서 출발해 한강공원을 따라 달려 방화대교 아래의 반환점을 돌아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코스상으로는 평지로 달리기 때문에 다행이라 생각하고 위성지도까지 찾아보며 코스를 마음에 그렸다


            


 



 



대회 일주일을 앞두고 기념품과 배번이 도착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노란 양말을 대회 당일 신기로 했다

이전까지는 일반 양말을 신고 뛰었는데 쿠션이 있는 양말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들 중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사용하기로 했다


              


 



주 2회 10~15km씩 달리며 달리는 느낌을 기억하려 애썼고 준비가 착실히 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 가지

날씨가 마음에 걸렸다

대회 당일 비 예보가 있었고 오전 중 강수 확률은 무려 90%였다

'추운 계절이 아니니 비를 좀 맞는다 한들' 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비를 맞고 달려본 적이 없었다

작년 춘천 마라톤 때 세차게 비가 내리긴 했어도 대회 시작 직전에 그쳐 그때도 비는 피했었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느낌은 또 다른 쾌감이 있고 오히려 땀을 식힐 수 있어 좋다는 글을 보긴 했지만 타인의 경험이 나한테도 좋을 거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걱정도 보람 없이 날씨는 우중충 그 자체였다

짐을 챙기고 평소처럼 둘이 일찍 집을 나서 평화의 광장에 도착했다

아직 사람들이 모이기 전이라 한산할 때 홍보 부스 구경도 하고 무료 테이핑 서비스도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잔뜩 흐려 분무기로 슉슉 뿌린 듯한 간지러운 비가 내렸을 뿐이나 출발선에 서는 순간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걱정을 안고 내가 평소 좋아하는 출발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앞쪽의 가장자리

나는 내 빠르기를 잘 알기 때문에 초반에는 다른 사람들의 러닝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자리를 잡고 모두가 나를 앞질러 가는 활기찬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달린다


급할 것 없다


예전에 초반 오버런을 했다가 2km만에 퍼진 적도 있었고 천천히 2~3km를 달리다 보면 호흡이 점점 돌아오고 뻐근한 정강이 통증도 사라지며 편안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절대 초반에 무리를 하지 않는다

첫 하프에서 당황했던 부분 중 하나는 10km 때와 달리 하프 러닝에 참가한 사람들의 실력이 대단했다는 점이다

최근 가장 참가자들이 몰리는 인기 종목인 10km의 경우 다양한 능력치의 참가자들이 섞여있다

펀런의 개념이 강하다 보니 어린이부터 나이 드신 분들, 러닝 경험이 많지 않은 참가자들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고 걷는 분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하프런은 정말 달리러 나온 사람들, 기록을 의식하는 러너들이 많아 어디 끼어들 구석이 없다는 것이 첫 충격이었다

'다들 바쁘신데  제가 한 번 걸어보겠습니다'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그나마 첫 참가 때보다는 상황 파악 눈치가 생겨 내 능력에 맞춰 달릴 엉성한 계획이라도 세운 채 거리에 나섰다는 게 다행이었다

말했듯이 나는 발이 느리다

그리고 오버런은 중도 포기로 가는 지름길이다


꾸준한 10km 레이스를 통해 내가 파악한 내 능력치는 55분이 최상이고 좀 더 장거리를 뛰기 위해서라도 그 이상 무리를 할 수 없으니 조급함을 버리고 모두 앞질러 가도록 두고 나는 천천히 달린다


하프런은 15km 지점 정도를 지나면서 점차 간격이 생긴다

여기까지만 뒤처지지 않고 따라간다면 그 뒤로 골인 지점에 도착까지 내가 치고 나갈 기회가 생긴다

발은 느리지만 내게도 무기가 있다



根性 / 근성



흔히 말하는 '곤조'는 내 성격 그 자체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그 고집이 나를 멱살 잡아 골인 지점에 던져 넣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번보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이 대회에서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12~15km를 지날 무렵 호흡이 더없을 만큼 편안해지고 발이 가벼웠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사뿐하게 걸음걸음을 내딛는 기분이었다


말로만 듣던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 / running high)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몸이 편하니 당연 기분도 좋았다

비를 하도 맞아 그만 뛰고 방화대교로 데리러 와달라고 해 집에 갈까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었는데 안 가고 계속 달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쾌함으로 18km 지점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에 한강공원에서 상암으로 돌아가기 위한 고가 구름다리를 통과하면서 다리가 풀려 기어 올라가게 됐지만 두 번째 경험치 곤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고 달려서 올라갔다면 어땠을까

골인 직전 200m 앞쯤에서  반가운 얼굴이 나를 향해 팔을 크게 흔들었다



"부인아! 여기만 돌면 바로 앞이야! 다 왔어!!"



차에서 두 시간 잘 쉬고 나온 남편이 활기 넘치는 표정으로 나와 마지막을 함께 달려줬고 그 기운을 받아 가뿐하게 골인 라인을 통과했다




최종 기록은 02:02:57               



 



지난 대회보다 4분 가까이 기록을 당겼다

아마도 앞으로  2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근육통도 지난번보다 덜했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비 오는 날의 달리기는 정말 상쾌한 경험이었다

달리는 코스가 자전거를 타시는 분들의 주로와 겹치는 듯한데 비가 와 자전거가 없었다는 것도 좋았던 부분 중 하나였다

다만 진흙탕 길을 달리면서 곱게 신고 나온 새 운동화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박박 빨아 다시 깨끗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신고식이라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급수대에 중학생들이 나와있었는데 얘네들이 또 굉장히 귀여워서

"여기는 포카리예요!!"라고 외친다거나

"사람들이 물이 가득 들어있는 컵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가득 채워!!"

라며 스스로 상황 파악해 편의를 제공하는 노력이 고마웠다

물을 마시고 "고마워요"라고 인사하니 "파이팅하세요"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도 귀여웠다



나의 최종 기록을 짚어본다면

하프마라톤 참가자 총 1129명 중 634등

여성 참가자 144명 중 37등을 했단다

뛰면서 봐도 남성 참가자들이 월등히 많았고 내 힘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기록이 나왔다는 것에 나는 꽤 만족한다

이쯤 되면 달리기에 소질 있는 거 아니냐고 남편 붙잡고 잘난 척도 좀 했다


                  


 



이번엔 다친 곳도 없었고 몸성히 들어왔다

(남편이 빗물과 땀에 젖은 내 다리에 맨소래담을 듬뿍 발라줘 따가워 죽을뻔한 게 유일한 고통이었다)

다음 하프에서는 반드시 2시간 안에 들어와 앞자리를 바꾸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리 멀지 않은 초여름 안에 새로운 하프 기록을 세우러 가보자


             


두 번째 하프 마라톤 완주 기념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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