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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Jun 17. 2019

42.195 마이런

step 1 / 다시 달리다

혹독한 달리기를 연이어 마치며 마음에 품은 기대가 있었다


나도 사람인데 이 정도 달렸으면 살이 빠졌겠지


사람도 아닌 건지 살이 빠지기는커녕 입맛이 좋아져 평소보다 식사량도 늘고 그 와중에 마음 한편에 운동을 하고 있으니 좀 많이 먹는다 해도 체중이 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망상에 빠져있는 사이 체중은 지난봄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보다 오히려 2kg 정도가 늘어버렸다


망했다

어쩐지 밥도 술도 다 맛있더라니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여름이니 다이어트를 해보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라 달리기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체중 조절은 좀 해야겠다

몸이 가벼울수록 발걸음도 가벼운 건 당연한 거지만 내 경우에는 공복일수록 달리기가 편안하다

풀코스를 달리면서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나름 최적의 상태를 위해 아침 달리기를 준비하는 날은 전날 저녁을 가볍게 먹거나 건너뛴다

저녁 달리기를 하고 싶을 땐 아점으로 간단히 먹고 다시 배가 고파질 무렵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

지난 저녁도 그렇게 일찍 점심을 먹고 소화가 되길 기다려 해질 무렵 저녁 달리기에 나섰다



마라톤 풀코스 참가 이후 2주 만의 첫 달리기였다






5월 말에서 6월 첫 주 사이 일주일 간격으로 풀코스를 달렸고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회복을 위해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만 쉬었을 뿐 그사이 오사카로 출장도 다녀왔고 또 다른 취미, 못 본 영화를 몰아보느라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등 일상은 여전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거리를 달리기 기준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

예를 들어 영화관까지 30km 거리라고 하면 지금부터 달려가면 몇 시간 후에 영화를 보게 될까 와 같은 달리기 기준의 사고가 장착되고 있다고 할까

달리지 않는 동안도 주법에 대해 찾아보거나 달리는 상상을 하며 바른 자세를 습득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의욕을 다 따라주기엔 몸과 정신머리의 한계가 있어 스트레칭을 위해 새로 구입한 요가 매트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TV를 본다거나 달리기 중 먹으려 구입한 간식들을 그 매트를 깔고 앉아 홀랑 까먹어 버리기도 했지만 내 마음속 달리기의 비중은 결코 좁아지거나 하지 않았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달려보자


이젠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하프 코스의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대회까지 3주간의 시간 여유가 있으니 기록 단축을 위한 노력을 해보자

 





마음을 다지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초여름의 해변 공원에 들어섰다

집에서 공원까지가 2km 남짓해 왕복만으로도 4km가 된다

거기에 공원을 왕복하면 15km 정도가 나오니 운동하기엔 최적이기까지 하다

가을엔 안 뛰어봐서 모르겠지만 봄엔 벚꽃잎이 흩날리는 꽃길에서의 환상적인 러닝이 가능한 곳이다

오랜만의 달리기라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첫 발을 내딛는 느낌이 좋았다

오늘은 완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도 가벼워졌다

그간 다리가 잘 쉬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분 좋은 김에 여러 경로로 익혔던 주법에 대한 테스트도 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의식 없이 달렸지만 이번엔 팔을 흔드는 자세를 교정해보자

예를 들어 팔꿈치를 쑤욱 뒤로 당기는 느낌으로 흔들되 팔꿈치가 몸 앞으로 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는 글로만 봤을 땐 짐작이 안 갔던 그 동작을 익혀보기로 했다

뭔가 엉거주춤하게 발까지 덩달아 껑충거려졌다

막걸리 마시고 덩실덩실 춤추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게 아닌데

내가 상상한 모습은 힘 있게 팔을 뒤로 흑 당기며 날아갈 듯 다리를 앞으로 뻗는 멋진 모습이었는데

게다가 몸통에 중심을 두고 다리를 가볍게 움직인다는 대목도 따라 해 봤지만 뻣뻣한 나무통 같아 웃겨서 달릴 수가 없었다

복근의 힘으로 다리를 움직이라길래 복근 운동을 위한 매트까지 샀건만 깔아 눕고 TV만 본 대가라 할 말이 없는 데다가 그나마 며칠간 약간의 흉내라도 낸다고 운동 같지 않은 운동을 했더니 오히려 배가 당기고 움직일 때마다 아팠다

이 날의 꼴은 여러모로 우스웠지만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 때까지 덩실덩실한 자세로 좀 더 연습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몸통의 힘으로 다리를 움직이자, 팔은 뒤로 당기며 앞으로 밀어주는 느낌으로

계속 되뇌며 천천히 달리고 있는데 이번엔 위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 고기 굽는 냄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삼겹살!!



공원 옆에 캠핑장이 있는데 달리다 보면 카라반 캠핑장, 텐트 캠핑장을 연이어 통과하게 된다

날씨 좋은 주말이라 꽉 들어찬 캠핑장 여기저기서 갖가지 고기를 굽는 냄새가 공원으로 흘러들었고 달리는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분명 호흡과 자세를 생각하며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머릿속은 고기 굽는 상상으로 가득 차 버렸다

지글지글 굽다가 사악 오그라들 때 뒤집고 기름이 숯불에 떨어지며 타는 냄새를 맡으며 허브 소금을 솔솔 뿌려 그대로 쌈장을 푹 찍으면


상상하는 사이 8km 지점을 통과했다는 알림이 들려왔다

역시 집중의 힘이 무섭다

고기 먹는 상상을 하느라 힘든 줄 모르고 순식간에 10km 지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돌아가려면 캠핑장을 다시 지나가야 하는데

나만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전거로 천천히 따라오던 남편도 고기 냄새의 덫에 걸려들어 부부가 나란히 홀린 표정으로 오늘 저녁은 삼겹살이 좋겠다는 둥 기왕 먹을 거 1kg은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운동과 전혀 동떨어진 대화를 주고받으며 반환 지점을 통과함과 동시에 마음은 이미 마트에서 고기와 상추를 골라 담으며 헤벌죽 웃고 있었다

가는 길에 올려졌던 고기가 다 익었는지 돌아오는 길의 고기 타는 냄새는 더 진해져 공복에 가까운 위와 무아지경의 뇌를 마구 공격했다


목표는 20km를 채우는 것이었지만 15km 통과 알림을 들으며 서로 마주 보고 동시에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다음의 목적지는 뻔했다

공원을 나와 다시 2km 남짓 거리의 마트를 향해 걸었는데 그나마 지나가던 길가의 고깃집 냄새에 2차 영업을 당해 그대로 스르륵 식당으로 입장

모처럼의 운동에 대한 죄의식도 없이 고깃집 아저씨가 넣어준 활활 타오르는 숯불을 홀린 듯 쳐다봤다

그래 먹자

먹고 마시고 후식으로 더위 사냥을 반 나눠 사이좋게 입에 물고 배부르게 돌아왔다

이래서 운동을 하고 있음에도 몸이 좋아지는 거였어


이렇게 2주 만의 운동은 절반의 애매한 성공으로 마무리됐다

간단한 훈련일지를 만들어 본다면



      2019년 6월 16일 일요일

달린 거리 / 14.83km
달린 시간 / 01:15:20
 
컨디션  / 몸이 가볍고 달리기가 힘들지 않았음

그 외 / 도중에 멈췄지만 20km 정도는 무리가 없었을 것 같았음
평소 신는 러닝화가 아니어서 발목 안쪽이 신발에 닿아 조금 아프긴 했는데 가벼운 달리기라 큰 무리는 없었음
점심 식사 후 5시간 만에 달렸지만 위가 조금 무거웠고 처음엔 당기는 느낌도 있어 좀 더 공복 상태에서 달려야 불필요한 신경을 쓰지 않고 달리는데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음

해야 할 일 / 정확한 기록 체크


좀 엉성하지만 달리기의 폼이 잡혀가듯 기록일지도 쌓이다 보면 형태가 나아지겠지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고 내게 필요한 건 꾸준히 나가 달릴 수 있는 의지

습관이 될 때 까지는 그게 제일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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