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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Jun 22. 2019

42.195 마이런

step 2 / 걸으면 안 돼

다시 달리기 3일 차

발이 가벼웠다는 첫날과 달리 둘째 날은 땅귀신이 발목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걸음걸음이 무겁고 뻣뻣했다

결국 8km 조금 지나 달리기를 멈췄는데 달려간 만큼 되돌아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쉬엄쉬엄 뛰다 걷다 반복하다 보니 마라톤 때 힘이 빠져 걸으며 느꼈던 당혹감이 온몸에 퍼지듯 스며들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느낌이지만 포기란 역시 기분 나쁘다

무기력을 떨쳐버리려 발을 내디뎌 봤지만 이날은 다리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러닝 종료

대체 무슨 문제로 달리기를 포기했는지 출발부터 다시 되돌려 열심히 생각을 해봤다

8km를 달려 반환점에 도착했을 때 까진 확실히 힘이 남아 있었지만 잠깐 쉬었던 것이 이날은 오히려 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날은 뭐에 홀렸는지 저녁 무렵 물이 들어오는 바다를 보는 것도 그 위를 낮게 내려오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것도  유독 마음에 들어 감상에 빠진 나머지 시간을 지체해버렸다

저녁 바다 바람을 맞는 사이 땀도 식었고 올라왔던 근육도 느슨해지며 힘이 풀려 나중에는 걷는 것마저도 피곤하고 다리에도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찜찜한 기분을 너무 잘 아는데 이 묵직한 피곤함이 올라오는 구간이 바로 풀코스 마라톤의 33km를 지나는 지점이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포기의 상태나 거리는 남았고 그럼에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당혹스럽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짜증이 나는 딱 그 느낌

이날의 걷기를 계기로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뛰기로 마음먹었다면 적어도 지레 포기하지 말고 제자리 뛰기 같은 걸음이라도 뛰어서 들어가야 한다는 나름의 각오였다

뛴 거리가 멀고 힘들다 해도 걷기 시작하는 순간 피로도가 훅 올라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스스로 달려 체험하며 깨달았다

걷고 싶어 지는 구간은 보폭을 좁히고 불필요한 동작을 최대한 빼 힘을 덜 써가며 걷는 것보다 조금 나을까 싶은 정도의 기력으로 움직인다

호흡이 안정되면 다시 속도를 조금 올린다

달리다 보면 완급 조절의 기술이 몸에 배게 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내 경우는 걸음이 길어지는 순간 그날의 러닝은 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걷는다고 피로가 덜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걷는 동안 다리의 당김이라던가 조여놨던 근육의 힘이 풀리며 걷기가 더 괴로운 상태에 빠지고 만다

힘들더라도 목표로 한 거리 안에선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게 육체적 피로나 정신적 만족, 양쪽에 훨씬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힘이 떨어지는 것은 근력이 부족한 탓이니 운동으로 메꾸면 된다

(말이 쉽지 운동 삼아 12층 우리 집을 계단으로 걸어 올라오고 있는데 늘 9층이 한계다

9층 앞에 서면 정말이지 지옥 입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달리기의 깨달음을 계기로 걷는 구간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피로를 풀 겸 달리기를 하루 거르고 이틀 만에 같은 코스에 섰다

딱 10km만 쉼 없이 달려보자


하루를 쉬고 나서 인지 이때는 또 걸음이 가벼웠고 거리가 늘어날수록 속도가 붙었으며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킥의 느낌이 경쾌해졌다

보폭도 조금 넓어졌고 탁탁 바닥을 차고 달리는 느낌과 다리가 올라가는 느낌이 다른 날과 다르다는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날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미묘한 차이기는 하지만 40분대의 기록도 4분대 평균속도를 낸 것도 처음이었다

이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나는 늘 내가 느리다고 생각해왔고 느린 핸디캡을 나름 자신 있는 지구력으로 상쇄해왔다


어려서부터 못 달렸으니까

체력도 부족하고 운동을 못하니까

 힘든 게 싫어서


갖다 붙일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그 핑계가 다 헛소리였다는 사실을 이 달리기를 계기로 깨닫게 됐다


할만해서 하는 거고 꾸준히 방법을 찾다 보면 결국 어느 정도는 실력이 늘게 돼있다


나는 출발이 느리다

천천히 달리다가 몸이 풀리는 2km 구간을 지나야 그나마 보폭이 넓어지고 속도가 붙나 싶은 정도인데 이날도 시작은 다르지 않았다

2km 구간까지는 평균속도가 5'40"을 넘지 못하다가 3km 지점을 통과하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바람이 사나운 구간이었지만 별로 문제 되진 않았다

5km 지점을 통과하며 평소보다 빠르고 그럼에도 발이 가벼우며 뛰는 자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느낌이 왔다

땀은 줄줄 흘러내렸지만 솔직히 신나고 상쾌했다

멈추지 말자

10km를 채워 기록을 보자

목표가 생기니 약간의 피로감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상체가 앞으로 나가거나 기울지 않도록 자세에도 신경 썼다

10km 지점에 도착을 하고도 가속이 붙은 다리엔 힘이 남아 이후 5km 정도를 더 달리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일단 걷지 않으려 그 부분에 신경을 썼다

피로감을 명령하는 건 결국 내 기억이고 걷기 유혹이 한 번만 제대로 극복된다면 다음부턴 좀 더 질기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는 느낌을 기억하고 싶어 이튿날 저녁 다시 달리기에 나섰다

집 근처를 가볍게 5km 정도 달리자고 나섰다가 목표보단 조금 더 뛰게 됐는데 땅을 힘 있게 차고 달리는 느낌은 오히려 더 선명해져 이 새로운 달리기 방법이 머릿속과 다리 근육에 새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이 자전거로 함께 달려줘 위로가 됐다  확실히 혼자 달릴 때보다 큰 의지가 된다


기록이 조금 못 미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이 날은 달리던 중 날벌레를 한 움큼 삼켜 한차례 소동을 벌어지기도 했다)



달리기를 계속 이어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되도록 매일 뛰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문제도 있고 달리기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휴식일을 지키는 편이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달리기 외에도 근력 운동을 병행할 필요도 있고 식사 패턴을 바꾸는 것에 대한 생각도 진지하게 해 봤다

 어떻게 먹었을 때 가장 달리는 컨디션이 좋았는가를 생각하고 스스로 실험의 대상이 되어 끈질기게 즐겨볼까 한다


일단 이번 여름의 목표는 정해졌다


거리와 상관없이 완주할 동안 걷지 않는 것

좀 더 경쾌하게 달리는 방법을 몸에 익히는 것

하프 코스 (21.0975km)를 1:50안에 통과하는 것


 분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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