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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Jul 16. 2019

42.195 마이런

올해도 건강 달리기 대회, 그리고 순두부와 막걸리

작년 폭염 속에 참가해 호되게 고생했던 건강 마라톤 대회에 올해도 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작년처럼 끓는 여름도 아직 아닐뿐더러 대회도 내가 좋아하는 인천대공원에서 열린다 하니 고민할 이유가 없다

인천대공원은 해마다 꽃 시즌에 한 번씩 다녀오는 봄의 공원이다

마라톤 참가비는 내가 지금껏 다녀왔던 대회 중 가장 저렴한 단돈 만원

이 돈으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달리기도 할 수 있고 기념품으로  바닥이 도톰한 양말도 네 켤레나 받았으며 완주 후엔 작년처럼 따끈한 순두부와 막걸리도 제공받을 수 있다니 정말 혜자로운 대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 집합은 아침 일곱 시 

일요일 아침의 활동으로는 꽤 이른

전날 와인 한 병을 마셔서 인지 세상이 온통 적색 물방울 안에서 춤을 추듯 꿀렁거렸다

이대로는 또다시 숙취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공원 동문이 집합장소였으나 전혀 상관없는 정문에 떡하니 주차를 한 바람에 대회가 시작되기도전에 공원을 가로질러 걷거나 뛰느라 땀을 흘려 본의 아닌  준비운동이 돼버렸다

공원 안에는 평소 좋아하는 캔커피 자판기도 있고 아침 식물 냄새가 너무 청량해 그것만으로도 일찍 일어나 나온 보람이 느껴졌다




이번엔 배번을 운영본부에서 직접 받아야 했다 

위치를 몰라 우왕좌왕한 끝에 물어물어 대회장에 도착,  출발 10분 전에 도착 숨을 헐떡이며 찾아 간신히 장착할 수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위치가 참 애매했다

공원 주차장 바로 옆, 고가도로 아래 차도, 차량 통제가 안돼 몸풀기 체조를 하는 사이 노선버스가 지나갈 때면 바닷물 가르듯 체조하던 사람이 쩍 갈리며 길을 비켜줬다

체조하다 말고 버스에 손 흔들어주던 일요일 아침의 명랑한 러너들 덕분에 긴장도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작년에 대회가 열렸던 송도 뒷길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올해는 좁은 출발선의 뒤쪽에 끼여 느릿느릿 출발한다

도로가 좁아 치고 나갈 수도 없었고 1km 정도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종종거리며 앞선 주자를 따라 뛰었던 것 같다

달리면서 심히 불안했던 부분은 달려가는 길이 사정없는 내리막이라는 점인데 거의 2km에 육박했던 초반 주로는 경사가 꽤 있는 내리막으로 돌아올 때 기어오를 생각을 하니 아 오늘도 내 달리기는 물 건너갔구나라는 체념이 차올랐다

좁은 인도를 달릴 때도 여기저기 진 보도블록에 발이 걸리지 않도록 계속 주의하고  먼저 치고 나갈 주자들 길막이 되지 않도록 뒤쪽도 신경 써야 했다

달리기도 힘든데 신경 써야 할 주변 상황이 번잡하

쭉 인도를 달려 공원으로 진입, 다행히 아직 시간이 이른 편이라 공원 달리기를 하는 동안은 아침의 상쾌함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겨우 공원 안에 들어섰는데 이날의 1등 주자님은 벌써 한 바퀴를 돌고 공원을 나가고 있다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난 평소처럼 달팽이 기어가듯 느린 내 달리기를 이어갔다

어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거리 표시가 전혀 없어 내가 얼마나 달렸는가를 알 수 없는 건 답답했지만 평소 10km 정도는 자주 달린 편이라 스스로 거리를 가늠하며 달렸다

공원 정문 반환점에 급수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건너 주차장에 차가 주차되어 있는데 되돌아가지 말고 집으로?

라는 상상을 해보며 반환점을 통과, 다시 왔던 길대로 열심히 되돌아갔다

공원을 빠져나온 후 도로에선 신호에 따라 멈춰 서야 했기 때문에 집중이 떨어지고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가다 서고 또 가다 서고 드디어 대망의 언덕길에 접어들었을 땐 에라 모르겠다 라는 생각에 걷는지 뛰는지 구분이 안 되는 이상한 폼으로 꾸역꾸역 거리를 줄여나갔다

가다 보면 도착하겠지

달리면서 발걸음에 맞춰 리듬감 있게 복창을 하기도 하는데 이날의 복창은

"메로나, 메로나, 메로나, 메로나"

달콤하고 시원한 메로나를 상상하며  저 앞에 보이는 피니시라인을 향해 기운을 냈다


이 날의 기록은 딱 한 시간

들어오자마자 찬 물에 잔뜩 담가져 있는 생수병을 쑥 뽑아내 한 병을 원샷으로 들이부었다


'아 살 것 같다'


피니시 라인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은  이 대회의 시그니처인  따끈한 순두부 두 그릇을 받아 미리 자리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km를 달리며 흘린 땀과 시원한 물, 뜨듯한 순두부에 숙취가 모두 씻겨나간 듯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작년은 더워서 안 먹겠다고 순두부를 거부했던 남편이 올해는 본인이 받아서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가서 더 받아오라고 땀 뚝뚝 떨어지는 내 등을 떠민다



작년처럼 올해도 인천 막걸리 소성주를 한 병 받았다

대회 진행은 엉망이어도 끝나고 땀 흘린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성취감을 나누는 이 자리가 재밌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좀 더 잘 달렸다면 더 즐겁고 쾌감도 컸겠지만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게다가 여름 달리기는 정말이지 내 진을 쏙쏙 빼먹는 듯 체력의 부침이 느껴졌

마음 한편으로 처음 다짐했던 여름 동안 열심히 달려 단축하고 싶었던 기록과 달리기 성장에 대한 비관이 비집고 올라와 초조해지기도 했다

이게 아닌데

달리기에 집중해 멋진 다리 근육을 만들고 싶었는데 아무리 달려도 그 흔한 근육통도 느껴지지 않다니 이번 여름은 망한 걸까

그저 달리기 한 번에 발톱 하나씩을 성실히 갈아먹고 있을 뿐 나아지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그저 혼자 묵묵히 달릴 수밖에

달리고 또 달려 8월 말, 여름 끝의 마라톤 대회에서는 적어도 다섯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소박하지만 현실성 있는 꿈을 꾸며 목표 있는 달리기에 전념해봐야겠다




대회 다음날

저녁 달리기에 나섰다

평평한 평지, 아무도 없는 포장도로

이 조건 아래의 나는 여전히 꽤 잘 달릴 수 있다

평소처럼 10km를 달린 후 돌아가는 길에 집 앞 마트에서 천도복숭아를 샀다

땀에 착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과 물에서 막 건저 낸 듯한 추레한 꼴로 복숭아 한 주머니를 골라 올려놓는데 계산을 해주시던 분께서 운동을 다녀오나 보다고 말을 건네셨다

아 기쁘다


'저 열심히 한 티가 나나요?'


혼자 의미를 부여하며 사들고 온 복숭아는 새콤달콤하니 정말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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