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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Nov 12. 2019

42.195 마이런

5주간의 달리기 여정을 끝내다 / 2019 요코하마 마라톤

요코하마 마라톤의 참가신청은 지난 4월 중이었고 무려 7개월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이 마라톤 대회에 나서게 됐다

이 대회에 앞서 지난 4주간 매 주말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며 꾸준히 달리기 마일리지를 쌓았다

첫 2주는 하프로 각각 21km를 달렸고 다음 2주간은 풀코스로 각각 42km 이상을 완주하며 오래 달릴 수 있는 경험치와 장거리 달리기에 대한 이해를 자신에게 장착했다

그리고 이제 가을 마라톤 대계획의 끝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2019 요코하마 마라톤





해외 마라톤은 지난 8월의 홋카이도 마라톤 이후 두 달 만이다

도쿄올림픽의 마라톤 대회가 폭염을 피해 삿포로에서 열릴 것이고 코스는 매년 열리는 홋카이도 마라톤과 같을 것이라는 소식에 마라톤 코스를 먼저 달려봤다는 작은 감격을 느끼기도 했는데 그 비슷한 시기에 함께 신청을 해두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던 대회가 바로 이번 요코하마 마라톤이었다


이 대회는 풀코스와 릴레이, 2km 휠체어 경기로만 이루어지며 10km나 하프코스의 경기가 열리지 않는다는 차별점이 있었다

참가인원 거의 대부분이 풀코스를 뛰게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그 속에 섞인 주자로서 내 역할을 다하고 싶었다





최근 꾸준히 장거리를 달리면서 여러 변화가 있였는데 우선 풀코스의 거리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는 점이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물론 힘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죽겠네 생각하면서도 완주까지 스스로를 끌고 갈 수 있는 참을성과 약간의 근력을 얻게 됐다

홋카이도 대회 이후 애매하게 따라다니던 다리 통증은 어떻게 된 일인지 스르륵 사라져 더 이상 다리 통증에 지레 겁을 먹지 않게 된 것도 좋았다

이번 대회는 참가 인원이 많아서인지 제한 시간도 다섯 시간 반으로 제법 넉넉해 걱정 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아 마음도 편했다

기다렸던 만큼 즐기기만 하면 된다


가자 요코하마로!





요코하마 마라톤은 올해로 5년 차의 대회로 처음 대회에 관심을 가지게 됐던 계기는 예쁜 메달에 반해서였다

특히 첫 해의 메달이 가장 마음에 들지만 2015년이라면 숨쉬기 운동조차 버거워하던 운동과 담쌓았던 시절이라 당시 이 메달을 봤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감흥은 없었을 것 같다


대회를 해 이틀 전 요코하마에 도착했고 제일 먼저 배번과 기념품을 받으러 행사장으로 향했다

해외 참가자 부스에서 등록을 하고 배번을 지급받은 후 행사장의 여러 부스를 돌며 마라톤 용품들을 구경했다

달리기 중 힘 떨어지는 코스마다 먹도록 세팅된 '완주 세트' 상품도 구입했고 수집 중인 대회의 코스가 프린트된 티셔츠도 기꺼이 구입했다

이제 잘 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대회 당일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일찌감치 대회장으로 향했다

2만 4천여 명의 참가인원 (풀코스만 약 23000명) 규모에 맞게 내게 배정된 H블록만으로도 주자가 넘쳐났고 시작 20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으며 뒤로도 아직 출발 전인 많은 후발 참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지역의 큰 행사답게 응원과 구경을 나온 시민들의 흥으로 거리가 넘쳐났고 개성 있는 콘셉트를 내세운 응원단들로 걸음걸음이 즐겁기만 했다

발 느린 내가 추구하는 내게 딱 맞는 마라톤의 방향이 즐기는 달리기, 일명 '관광런'이다 보니 흥겨운 분위기와 응원만으로도 가볍게 등 뒤를 밀어주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2km를 훌쩍 지났다

이런 기세라면 잘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역시 세상에 호락호락한 달리기란 없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초반 정체가 극심했는데 느리기로는 별반 다르지 않은 내 걸음이 나를 인파 사이에 묶어버렸다

빠져나가려 해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고 사이사이 자리를 찾아다니느라 오히려 기운 소모가 심해 일단 정체 속에 묻힌 채 당분간 달리기로 생각을 바꿨다

흐름에 묻어가는 달리기도 편안하고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커브를 돌 때나 꽉 막힌 구간을 통과할 때는 달리기를 멈추고 걷거나 팔을 내려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등 못 달리는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충돌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발은 느려도 눈치는 빨라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내 능력껏 자리를 만들어 달려 나갔고

중반 이후 치고 나갈 능력이 없는 나를 잘 아는 만큼 이 타이밍에서 마음을 한 번 다독였다


'제한 시간은 여유 있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달릴 수 있는 즐거운 기회이니 욕심내지 말고 편안히 완주나 해버립시다'


10km는 힘들지 않게 통과했다

하다 보면 실력이 는다는 말은 달리기에도 적용이 되나 보다

연속으로 장거리 달리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이전보다 달리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대회 준비도 굉장히 잘 되어있어 3km 정도 간격의 급수대와 초콜릿이나 사탕과 같은 간단한 간식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며 자원봉사를 나온 코흘리개 어린 학생들이 간식을 한 움큼씩 내밀며 힘내라는 응원을 보태는 모습에 절로 흥이 났다

급수대 300m 전에 미리 알려줄 뿐 아니라 급수대마다 개성 있는 응원팀과 신나는 음악으로 기운을 북돋우는 스피커 등도 함께 기다리고 있어 지루함을 덜 수 있었다

지금껏 참가비를 냈던 대회 중 가장 비싼 대회였는데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급수대 근방에는 어김없이 간이 화장실도 배치되어 있었고 도중 화장실에 한 번 들렀던 것이 이 달리기의 유일한 오점으로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 소중한 시간을 10분이나 낭비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길이 머니까 부담스럽지 않게 먼저 다녀온 것으로 생각하자'




이런 화장실이 300m 간격으로 있었고 깨끗했으며 협찬사의 탈취제까지 단정히 놓여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내가 속한 H그룹은 이미 저 멀리 길을 떠났고 뒤이어 출발한 새로운 주자들 속에 섞여 달리기를 이어갔다

10km 이후 20km까지는 화장실도 다녀왔고 급수대에서 선보인 칵테일 쇼도 구경하며 쉬엄쉬엄 달려 지루하거나 힘들 틈도 없었다

다만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졌을 뿐

그러나 그냥 쭉 달릴 것인가 즐길 것인가의 갈래에서 즐기는 쪽을 선택했으니 후회는 없다




이온 음료와 얼음을 섞은 칵테일 쇼도 볼 수 있었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려는 사람들로 초 인기였다


20km를 지나면서 첫 반환점을 돌았다

좀 늦어지긴 했어도 여기까진 힘들지 않게 잘 달렸다 싶었고 지금부터 다소 지루한 하이웨이 코스로 진입하게 되니 딱 10km만 집중해 달려보자고 정신을 다잡았다

이미 절반을 지났고 어찌 됐든 달리기를 끝내려면 남은 거리를 달려서 들어가야 하니 꼼수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럼 한 번 달려볼까나





고속도로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속도로에도 언덕과 같은 높낮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으며 정신이 살짝 오락가락한 상태로 그늘도 없는 땡볕의 도로 10km를 달렸다

달리는 방향은 편도지만 양방향을 모두 통제해 고속도로는 오직 달리는 사람들만의 땅이었고 다 같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속도가 느려진 걸음으로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앞도 뒤도 행렬이 꼬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속의 한 사람으로 느린 속도로라도 달리는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며 나도 한 발씩 열심히 거리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태를 예상한 듯 유독 화려한 응원과 공연이 그 길 위에서 펼쳐지기도 했는데 이런 응원은 처음 봐서 솔직히 힘든 가운데서도 즐겁기 짝이 없었다





마의 30km를 통과하며 드디어 고속도로에서 내려왔지만 지나고 나서 떠올려보니 고속도로 위에서 보낸 시간들이 가장 힘들었고 가장 재밌었으며 달리기 외엔 다른 생각이 없었던 충만한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달리기를 하면서 스스로 가장 즐겁다 생각하는 순간은 힘든 가운데 집중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타이밍이 아닐까 싶은데  이 날은 고속도로 위에서 그 즐거움을 아낌없이 만끽할 수 있었다


최고의 10km, 최고의 1시간을 보내고 후반부의 마지막 10km 지점에 접어들었다

여기부터는 다시 시민들의 거리 공연과 응원 속에서 힘을 얻어 자신을 쥐어짜듯 마지막 힘을 쏟아부었다

달리는 중 귀에 꽂혔던 누군가의 외침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할 수만 있다면 대신 달려주고 싶다! 힘내라!!"


내가 직접 달리는 입장에 서보기 전에는 응원이 실제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막연히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응원의 힘은 그 이상의 격려였고 정말 큰 힘이 됐다

달리는 중 누군가가 나와 열심히 눈을 마주치며 목청껏 응원의 힘을 실어줬다

'잠깐 보고 스칠 사람인데 저렇게 진심으로?'

대회 후 사흘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걸 보면 순간 마음이 통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 아직도 감동 중이다


39km를 지나는데 "앞으로 3km다! 힘 내!"라는 외침이 들려오니 어쩐지 힘이 빠졌다

'아직도 3km나 더 가야 하다니'

머릿속으로 생뚱맞은 계산을 해봤다

'우리 집에서 마트까지 걸어서 다녀오면 왕복이 3.7km니까 가는 길에 이쯤이면 버거킹을 지나고 좀 더 가면 스타벅스가 나오고..'


드디어 40km 통과


이어서 41km도 통과


출발 전에 피니시라인을 미리 봐 뒀는데 곧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정확히는 42km 지점이고 남은 195m는 완주의 감격을 마무리할 수 있는 서비스라고 생각하며 완주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성취감과 감동에 충분히 젖은 채 지난 5주간에 걸쳐 달려온 가을 달리기를 끝내는 선을 통과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용애 씨♡







대회 직전에 작은 유리조각이 발바닥에 박히는 곤란한 사고가 있었다

처음엔 느낌이 없어 긴가민가 싶었는데 박힌 부위가 부어오르고 통증이 심해져 내심 이번 달리기는 틀렸다고 낙담했었다

걷는 것도 부자연스러운데 달리기가 가능할까

그런데 대회 전날 저녁 거짓말처럼 유리조각이 발바닥에서 튕겨져 나왔다

깊이 박히지 않았고 전날 관광 삼아 여기저기 걸음을 많이 걸었는데 가뜩이나 단련되어 있는 단단한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면서 얕게 박혔던 유리조각이 튕겨져 나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발바닥 상태를 확인해주던 남편이 유심히 살핀 끝에 내 발바닥의 완치 판정을 내려줬다

(몽골의 독수리도 아니고 인간 시력이 2.0이라니

-4.75의 나와는 같은 세상을 봐도 다르게 보이는 게 틀림없다)

상처 자국이 생겨 박혀있을 때보다 따끔한 느낌이 더하긴 했지만 유리조각도 나를 돕는 이 마당에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 후 줄지어 이동하며 자원봉사자의 축하 인사 속에 메달이 목에 걸렸다

그토록 탐냈던 대회 메달을 내 느린 다리로 따냈다는 뿌듯함에 절로 환한 웃음이 났다

완주자를 위한 간식도 제공됐는데 방울토마토, 삶은 달걀, 초절임 양념이 된 주먹밥을 받아 기다리고 있던 남편과 함께 나눠먹었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나눠먹은 적은 양의 간식은 평생 못 잊을 꿀맛이었다  

메달을 걸고 절뚝이는 다리로 이동해 완주 타월을 받고 체온이 식기 전에 서둘러 대회장을 빠져나왔지만 다리가 굳어 일단 커피숍으로 이동, 잠시 앉기로 했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는 나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난 달릴 때는 아이스가, 달리고 난 후엔 따뜻한 커피가 생각난다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옆 테이블의 외국인 아저씨가 (아, 나도 외국인이지ㅋ) 갑자기 메달을 들어 내게 자랑하길래 엄지 척해주고 씩 웃으며 내 메달도 보여줬다




달리는 중 39km 지점에서 쓰러진 주자를 봤다

주변의 러너들이 달리기를 멈추고 그 사람을 보살펴주고 있었고 곧이어 구급 용품을 들고뛰어 올라가는 구급대원도 봤는데 그 역시 걱정이 오래 남는다

이전의 하프 대회에서 길에서 넘어진 나를 돕느라 달리던 바쁜 걸음을 멈추고 진심으로 도와주셨던 분들도 생각났고 한 번 받은 호의가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아 좋은 영향을 받는다는 자체가 달리기의 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자로서가 아니라 자원봉사로 참가할 기회가 생긴다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내가 받은 도움만큼 누군가의 달리기에 힘을 보태고 싶은 진심이 있다




지난 5주간 매 주말 대회에 참가했고 꾸역꾸역 달려 주어진 달리기를 마쳤다

첫 2주간은 하프 21km를 달렸고 이후 3주는 연속으로 42km의 풀코스 거리를 완주했다

완주가 가능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는 내 느린 다리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전력 질주가 아니다 보니 늘 기운이 남았고 하루를 쉬면 회복, 곧이어 장거리라도 비슷한 정도의 연주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달리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고 기꺼이 장거리의 당혹감과 고통을 받아들인 이유는 달리는 도중 빠져드는 집중의 상태가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나 밖에 없는 그 무아지경의 상태가 좋아서 그지 꼴을 하고 다리를 절며 돌아와도 달리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좀 늦으면 어떤가 내가 좋다는데

제한 시간 안에 따박따박 들어오고 타인의 달리기에 대한 방해 없이 참가비를 낸 만큼 충분히 즐기겠다는데 이 얼마나 건전한 달리기란 말인가

내게 마라톤이란 지불하는 비용과 노력 대비 만족감이 큰 혼자 노는 방법 중 하나다

혼자 놀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고 감동이 커서 더 좋은 유흥이다


가을 내내 주말마다 달리기를 하면서 풀코스를 제한 시간 내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경험, 힘과 기술을 장착할 수 있었다

이 작은 기술을 밑천으로 세상 어디서든 달리고 이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시간을 허투루 날리지는 않았구나 싶은 뿌듯함도 가지게 됐다


내 달리기는 끝이 아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난 이미 달리기 안에 들어와 있다





얼마 안가 요코하마 마라톤은 쾌적한 대회 진행을 위해 곧 추첨으로 전환될 확률이 높아보인다


다시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즐거웠다 요코하마의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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