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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Nov 04. 2019

42.195 마이런

완주의 조력자, 페이스 메이커와 함께 달리다 / JTBC마라톤


올해 국내에서 참가한 마지막 대회는 JTBC 마라톤


우연히 품은 풀 마라톤의 꿈에 발을 내디뎌 지난 5월 첫 참가로부터 이 대회까지 여덟 번의 풀코스를 뛰었고 두 번의 실패, 섯 번의 성공이라는 작은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첫 참가 대회의 완주 기록은 5시간 6분

이후에도 각종 대회마다 6분에서 7분 사이의 시간을 오가며 고전을 반복했고 '나는 장거리 달리기를 하기엔 역량이 부족한가 보다'라는 실망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난 춘천 대회에서 기대보다 잘 뛰어 잘하면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은 지 일주일 만에

 열심히 달려온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출발선에 다시 서게 됐다



 2019 JTBC 마라톤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지만 대회 시작이 8시로 빠른 편이라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 동이 트기 전 대회장소인 잠실 주경기장에 도착했다

올해 첫 참가 대회였던 동아마라톤이(10km) 이곳에서 열렸었는데 시작과 끝이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지난 춘마를 되짚었을 때 가장 가능성 있는 완주 방법은 '초반 집중력 유지 여부'였다

완주까지 거의 다섯 시간을 모두 소진하고 있는 내가 그 긴 시간 동안 일관된 속도와 일정한 집중력을 발휘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집중도 체력이 뒷받침될 때 가장 효과가 있다고 한다면 내겐 달리기 초반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 10km에서 최대한 시간을 벌어두고 25km까지만 어떻게든 끌고 간다면 뒤는 뛰던 걷던 제한 시간 내에 들어오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다만 기록에 따른 구분으로 후미그룹 출발자이다보니 초반 정체가 너무 심해 의도와 달리 제자리 뛰기와 같은 달리기를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춘마, 제마가 모두 그랬다

마음은 급하지만 현실이 뜻 같지 않고 빈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뛰다 보니 쏟아부은 힘에 비해 기록이 시원치 않아 낙담했다

한 번 멈추면 페이스가 흐트러지기 쉬워 최대한 참고 갈 수 있는 곳까지 물도 마시지 않았다

15km까지만 갈 수 있다면 일단 초반 위기는 잘 넘겼다고 생각한다

기록이 빼어나진 않지만 평소 하프 거리를 달리는 정도는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21km까지는 평소처럼 달리고 25km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달리기에만 온 정신을 쏟아붓기로 했다


그다음의 17km는 또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일단 가던 길을 간다




이번 JTBC 마라톤은 코스가 늦게 나와 코스에 대한 추측이 여러 갈래로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마포라는 의견이 한 때 유력해 기대했지만 결론은 잠실을 한 바퀴 돌아 저 멀리 수서 구경을 다녀오는 쪽으로 정해졌다

내가 장소 가릴 입장도 아니고 수서역도, 멋진 서울공항도 처음 보는 곳이라 관광런을 펼치는 내 입장에선 꽤 재미있기도 했다

다만 돌아오는 32km 이후 코스를 넘어가면서 현타가 왔는지 잠시 내가 있는 곳, 내가 본 것들이 아득하게 느껴지며 기억 저 멀리 흩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28에서 35km 구간은 음악을 들으며 달렸다

힘 떨어졌을 때 약으로 삼으려고 초반엔 아껴뒀던 비장의 무기였다

평소 이어폰 꽂고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힘도 빠지고 걸음이 느려진 중반 이후의 기분전환엔 꽤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앞으로도 종종 음악의 힘을 리기로 했다


이날은 시간을 체크하며 달리지 않아 솔직히 제한 시간 안에 들어가긴 틀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힘이 쭉쭉 빠지고 내 걸음이 느려지는 정도가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어쩔 수 없다

'그래도 10km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완주는 하자'

기운은 빠졌지만 포기할 생각이 들지 않아 그냥 가기로 했다

설상가상 쥐가 나기도 했고 허벅지 안쪽이 저리며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마음먹은 대로 잔 걸음으로라도 달릴 수 있는 구간은 달리며 거리를 줄여갔다

36km쯤에서 처음으로 시간을 확인했는데 순간 내 눈이 의심스러워지며 눈이 번쩍 뜨였다


12:20분


후미 출발로 가지고 있는 11분을 포함, 아직 내겐 51분이나 시간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어디서? 왜 시간이 남지?


분명 10km 통과 후 확인했을 땐 평소와 다르지 않아 실망하며 이후 시간 체크를 포기했는데 어디서 잘 뛰어졌을까

갑자기 힘이 세지는 강력한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힘이 솟았다

이 시간이라면 지난번보다 나은 기록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다 죽어가던 의욕이 솟구쳤다

부지런히 가보자


하지만 물먹은 솜처럼 쭉쭉 내려앉은 다리는 이내 못 달리는 모드로 되돌아갔고 나는 평소처럼 스스로를 살살 달래 가며 한 걸음씩 나갔다

'이 다리만 뛰어서 건너자'

'저 앞의 점등 신호까지만 뛰어가자'

'39km부턴 걸어 들어가도 되니까 그때까지만 참자'

머릿속이 전쟁을 치르는 사이 야금야금 거리를 줄여 드디어 40km 표지를 통과했다


'아 드디어 2km다'


여기부턴 마중 나온 사람들로 길가가 북적이고 뭔가 기운을 돋울 요소들이 많았지만 이번 따라 내 다리가 더 이상 달리기를 거부한다

'나도 죽을 것 같다고

다 왔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끝내버리고 쉬자'

다 와서 걷는 게 아까워 보일 수 있지만 다리가 자의식을 가지고 독단적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이상 내 몸뚱이라도 방법이 없다

대책 없이 아까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드디어 주경기장의 입구가 보였다

종종걸음이라도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 다리와 내 정신머리가 타협을 봤다


'내가 언제 또 주경기장의 트랙을 달려볼 수 있겠어'


영광스러운 기회니 놓치지 말라고 진심을 다해 내 다리에게 호소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 내가 트랙을 천천히 달리며 돌고 있었다

사회자의 멘트도 귀에 정확히 들어와 꽂혔다

"지금 직선 주로에 계신 분들은 5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힘을 다해 달렸고 드디어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기록은 4시간 49분 38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49분대를 뚫었다

만세!!!


제주에서 처음 받았던 풀코스의 기록보다 17분이 빨라졌다

1년의 수고가 하나도 아깝지 않

기쁜 마음으로 메달을 받고 곧바로 마킹 서비스를 받으러 갔다

이번 대회의 스폰서인 나이키에서 풀코스 완주자를 위해 메달에 이름과 기록을 새겨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  완주해서 내 이름과 기록을 남기고 싶었는데 이 작은 소원도 내가 완주를 할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준 작은 희망 중 하나였다




대회를 마치고 복기를 하면서 이번 대회의 어떤 부분이 내 걸음을 조금이라도 당기는데 도움이 됐는가를 생각해봤는데 확실히 이전과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마라톤 완주의 조력자

바로 페이스 메이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 그랬다


마라톤 대회에는 페이스 메이커라는 달리기의 도우미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완주 목표 시간대별로 배치되어 달리는 페이스를 맞춰주고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고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해주는 동반자 역할을 수행하는 분들이다

등에 목표 시간이 기록된 커다란 풍선을 달고 달리며 이분들과 함께 달리거나 헤어지는 것은 달리는 사람의 자유며 나는 지난 대회부터 이분들의 도움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었다

내 페이스가 일정하지 못하니 일단 달릴 수 있는 만큼 쭉 거리를 빼놓고 중반 이후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착실히 목표 시간에 맞춰 달려온 이분의 무리와 만나게 된다

계속 함께 가기엔 내 주력이 시원치 않아 여기에 묻어 얼마간의 달리기를 한 후  다시 내가 처지기 시작하면 헤어진다

또 조금 가다 보면 다음 목표 시간대의 페이스메이커나 뒤이어 나타나고 나는 또 이분들과 어울려 얼마간은 고통을 잊고 함께 달린다

이번 대회에선 시간대별로 총 네 번의 페이스 메이커를 만났고 연이어 도움을 받으며 달리기를 이어갈 수 있었고 앞으로도 내가 일정한 페이스로 달리기가 가능해지도록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대회 중반 이후 내가 믿는 구석이 이렇게 하나 더 추가됐다


반환점을 돌아 달리던 중 반대편에서 제한 시간에 맞춰 뒤를 닫는 차량이 따라오는 것을 목격하고 이번  역시 뜨끔했지만 차량과 내 사이엔 꽤 안전한 시간대가 흐르고 있단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잡히지 말고 얼른 도망가자!)



힘이 떨어지기 전에 시간 맞춰 먹은 파워젤이 몸속에 쌓였는지 완주 후에도 배가 고프기는커녕 소화불량에 걸린 마냥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차 괴로웠다

다리는 굽히지도 못할 만큼 아프고 뱃속은 뱃속대로 난리고 피곤한 눈꺼풀도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제 시간 안에 완주를 마치고 나니 마음만은 가볍다


반년 만에 제한 시간 내에 여유 있게 들어오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정말 다양한 일들이 있었고 하나씩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가운데 어설픈 완주자의 달리기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대회 후 하루가 지났다

신기하게도 이전의 통증은 스르륵 사라졌고 어제 달리기의 여파로 허벅지 근육통이 생겼지만 이틀이면 사라질 정도의 훈장과도 같은 통증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 좋았던 혹은 다시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내 체력을 무시할 수 없듯 내 한계치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10km는 1시간 이내,

하프코스는 2시간 5분 이내,

풀코스는 4시간 40분이 내가 뛸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다만 장거리로 갈수록 변수가 많고 컨디션에 따라 조금 더 나은 결과가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단 한 번 뿐일 내 인생의 기록을 꿈꾼다

아직 내 나름의 레이스 중이고 나아질 기회가 있어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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