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95 마이런
가을의 전설, 춘마의 완주자가 되다
가을을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었다
춘천마라톤
'춘천의 짙은 가을을 눈에 담으며 달려보는 것'
올해 내가 꿈꾸는 마라톤 여행의 정점에 춘마가 있었고 그 소원대로 춘천의 가을을 즐기며 달려 드디어 완주 메달을 목에 걸었다
기록은 04:52:56
4시간 52분 동안 달려 얻은 예쁜 성취에 내가 가을의 주인공이 된 듯 진심으로 뿌듯했다
2019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춘천으로 가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지난주 경주의 완주 실패 후 의기소침해져 자신감도 떨어지고 대체 42km를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달리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막막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런 마음으로 완주를 할 수 있을까
새벽의 커피를 보온병에 담고 사과와 떡을 챙겨 집을 나섰다
춘천 가는 어두운 길, 고속도로를 달려 마지막 휴게소에 들러 간단한 식사를 했다
달리기 시작 세 시간 전이라고 남편이 일부러 식사시간을 맞춰 사준 새벽 우동, 얼리 모닝 라면은 불편한 마음과 달리 따끈하고 맛만 좋았다
휴게소엔 우리 말고도 대회 참가자들이 있었고 다들 비슷하게 일찍 집을 나서 마지막 식사를 하는 듯했다
든든한 식사 후 달리기 중 허기질 때에 대비해 휴게소 편의점에서 초코바도 구입했다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 내가 잘 뛰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리 자신이 없을까
작년처럼 대회장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 후 차 안에서 한 시간 가량 눈을 붙였다
밤잠을 설쳐서인지 의외로 짧고 깊은 잠에 빠졌고 뒤늦게서야 대회장 주변을 돌아보며 대회 분위기에 발을 맞췄다
세찬 비가 내렸던 작년과 달리 쌀쌀하긴 하지만 달리기엔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 올라왔고 이벤트 부스에서 아미노산 보충제를 시식으로 받아서 먹기도 했다
잘 달리고 싶은 마음에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고 지구대 화장실도 빌려 다녀오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데우며 보온용으로 입고 있던 두꺼운 옷도 하나씩 벗어 남편 손에 쥐어줬다
( 이 양반은 내가 다녀올 동안 춘천의 PC방 여행을 할 계획이다 )
국내 대회로는 지금껏 참가했던 대회 중 최고의 인파였다
불과 얼마 전 송도에서 31명이 달려 25등을 했던 완주를 떠올리니 이 대단한 규모만으로도 흥겨워 기분이 좋아질라 했다
풀코스 출발은 A에서 F그룹으로 나뉘어 있었고 나는 기록 미보유자 그룹인 F로 가장 후미에서 출발하게 됐다
다른 대회와 달리 제한 시간이 6시간으로 넉넉해 쫓기는 마음 없이 뒤에서 천천히 달려 완주를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대회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고 선두그룹이 출발했다
아 두근두근하다!
나는 얼마의 시간을 달려 이 자리로 되돌아오게 될까
살짝 긴장한 상태로 출발선을 통과했다
대회 시작으로부터 20분이 지난 9시 20분,
드디어 나만의 춘마가 시작됐다
첫 10km 정도는 작년에 달려 경험이 있는 아는 길이라 쭉 달려 나갔다
잘 뛰었다고 생각했지만 기록으로 보면 평소와 별 다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초반 정체가 심해 인파에 갇혀서 함께 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 듯했다
작년엔 불과 10km의 짧은 주로에 속한 이 언덕길을 달리면서 헥헥거렸는데 1년 사이 경력이 쌓여 작년을 회상하며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이 대회는 여러모로 완벽했는데 급수나 스펀지가 정확하고 넉넉하게 제공됐고 1km마다 심장제세동기가 구비되어 있었으며 하프 이후로는 0.5km 단위로 달려온 거리의 표시와 5km 단위로 대회 진행 시간도 제공되어 집중력 있게 달리기를 이어 갈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됐다
도중에 초코파이를 먹으며 한 번, 바나나를 먹으며 또 한 번 작정하고 쉬었다 가기도 했으며 파워젤도 제공받았다
공주에서 조금 후미로 달렸다고 앞 주자들이 휩쓸고 간 초코파이 빈껍데기만 바라봤던 설움을 적어도 여기에선 느끼지 않아 좋았다
이번에 컨디션이 좋다고 느꼈던 것은 20km까지 쉼 없이 달리기에 성공하면서 였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잠깐씩 사진을 찍을 때를 제외하곤 이어 달리기가 가능해 스스로 '니가 웬일이냐' 싶었다
하프에 해당하는 21km 지점을 통과하기 직전 평소 내가 대회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일명 '낙오자 버스'
이 대회는 6시간 제한이라 강제로 저 버스에 태워질 일은 없었지만 전에 이 버스들이 줄지어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식겁해 내달렸던 공포의 경험이 있어 회송 버스를 보면 식은땀이 흐른다
스스로 목표로 했던 5시간 내 완주가 가능하겠다는 확신이 선 것은 25km를 지나면서 였다
근소하긴 하지만 평소보다 시간이 남았다
마음으로는 '후반에 걷뛰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반환점인 28km까지는 힘닿는 만큼 조깅런을 해서라도 통과하겠다'라는 나름의 각오가 서있었고 그 작은 목표를 이루며 더 바랄 것 없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반환점 이후 누군가 힘을 북돋우는 격려의 말을 외쳤다
"힘내! 온 것보다 남은 거리가 짧다"
그랬다
12km만 더 가면 오늘의 달리기가 끝난다
힘내자!!
역동적인 활기는 러너들만의 분위기가 아닌 듯 자원봉사로 동참한 학생들의 기운도 단단히 한 몫했다
주자가 많아 그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벅찼을 텐데 바쁜 손과 동시에 아낌없는 응원이 쏟아졌다
"힘내세요! 파이팅! 파이팅!"
달리는 중 급히 물 스펀지를 사용하고 마구잡이로 버리고 간 자리에서 한 여학생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용하신 스펀지는 막 버리고 가세요! 저희가 치울게요! 파이팅!"
(춘천 여학생! 나 완전 반했잖아요ㅜㅜ!!)
이어 저세상 텐션으로 율동을 곁들여 구호를 외친다
"막걸리! 맛있다! 막걸리! 파이팅!"
공주 가선 밤막걸리 마시고 춘천 왔더니 잣 막걸리가 땡기고 죽을 것 같은 달리기를 하면서도 입맛은 살았나 보다
약간 서늘했던 아침을 지나 정오 무렵부턴 따듯한 해가 났는데 달리기 하기에 좋은 날씨에 눈 돌리는 족족 시선을 빼앗는 절경까지
춘마의 즐거움을 작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0km 때는 문 닫힌 닭갈비 가게 앞을 달렸다면 이번 풀 마라톤에선 단풍과 의암호의 절경은 물론 지루한 코스에서 눈에 들어오는 배추밭까지 다 좋았고 간간히 마주한 응원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35km 지점을 통과한 시점에서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두고 시내로 접어들었다
PC방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호젓하게 보내고 있던 남편에게도 내가 35km 지점을 통과했다는 메시지가 들어갔다고 한다
(가족 연락처를 적긴 했지만 이런 서비스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 대회는 좋은 것 투성이잖아)
거리에서는 마지막 응원에 나선 러닝 크루들과 시민의 응원에 힘을 받아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꾸준히 달리는 중이라 그런지 느린 가운데서도 다리의 힘이 이전과 다름이 느껴졌다
이유 없는 통증에 시달리는 다리 때문에 스트레칭은 엄두도 못 내고 잠깐씩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달리기와 걷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누군가 컵에 담긴 콜라를 내밀며 마시고 힘내라 격려의 말을 건넨다
고마워서 눈물이 찔끔 나버렸다
(변변찮게 스쳐가는 저를 발견해 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배번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 지나가는 차의 유리창을 내리고 응원을 건너는 사람들, 얻어마신 물과 격려의 말들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었다
40km를 통과하고 마지막 길에 접어들었을 때
누군가의 "앞으로 9분이다 힘내" 대상 없는 격려에 달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9분입니까?"
내겐 9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건 알지만 묘하게 힘이 난다
마지막 1km를 남긴 도로에는 완주를 끝낸 사람들과 응원을 나온 사람들이 엉켜있었지만 달리는데 방해가 된단 생각은 안 들었다
그저 축제의 느낌과 몇 걸음 안 남았다는 희망에 설레어 들어가기도 전에 좋아 죽을뻔했다
정말 마지막 100m는 남은 힘을 다해 달려봤다
힘내 힘내 라스트!!!
드디어 피니시라인 통과
나는 첫 춘마 풀코스를 4시간 52분 56초에 통과하며 대회를 마쳤다
메달을 받는 기분이 평소와 달랐다
받을 자격이 된다는 생각에 받자마자 직접 목에 걸었다
시간상으로는 그렇게 빼어나지도 않고 대단할 것 없는 기록이지만 이번 달리기는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먼저 개인적으로는 신기록이라 기뻤고 그보다 좋았던 것은 달리는 내내 시간에 쫓기지 않았다는 점이 신나 죽을 것 같았다
풀코스를 뛰며 처음 한 경험이나 다름없었고 이런 달리기가 나도 가능하단 사실이 놀랍기까지 했다
할 수 있겠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못 뛰겠다고 풀 죽어 있던 인간이 다섯 시간 후엔 의욕에 차 다음 마라톤을 꿈꾸다니
내게 맞는 달리기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전반을 최대한 달려둬야 후반에 지쳤을 때 떨어지는 기록을 상쇄할 수 있다
나중을 위해 초반에 힘을 남겨둔다 해도 뒤에서 힘이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힘 있을 때 달려두고 후반은 당장은 밀리더라도 시간의 흐름에서 쌓일 노하우를 차곡차곡 적용해 점차 나아지도록 해보자
지방 마라톤을 다니게 되면서 항상 챙기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목욕가방>
대회장 근방의 목욕탕에 가면 대회를 뛰고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뭔가 나만의 뒤풀이 같아 꽤 기다려지는 마라톤의 일부분이 됐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때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정말 좋아 달리기로 진이 빠졌을 때 '빨리 뛰고 목욕하러 가자'라고 스스로 달래기도 할 정도다
올해의 춘천 목욕탕은 '자수정 사우나'
(작년에 갔던 화산 스파랜드가 입구부터 너무 북적여 포기하고 남편이 급히 찾아준 뉴 사우나였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퇴장 직전 평상 위에 잠깐 누웠는데 딱딱한 나무 평상이 폭신한 구름 위라도 되는 것처럼 눈이 스르르 감겼다
사우나에서 만난 대회 참가자와 서로 그지꼴을 한눈에 알아보고 동시에 웃기도 했는데 그분은 이제부터 막걸리와 막국수로 식사를 하러 가실 예정이라고 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서로 오늘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하고 나도 식사를 하러 가벼운 걸음으로 목욕탕을 나섰다
지역 목욕탕과 지역 맛집은 이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수원 하면 왕갈비, 춘천 하면 닭갈비
으리으리한 닭갈비집들이 즐비한 맛집 코스로 안내한 남편
(처음엔 맛있는 떡볶이집을 찾아뒀다고 해서 없는 기운에 분기탱천 벌컥 화를 냈었다)
유명하다는 닭갈비집에서 닭갈비 3인분과 막국수를 먹었고 집에 돌아오는 길 다시 출출해져 맥도날드 햄버거 세트와 사이드 메뉴를 포장해 집에서 와인과 함께 먹고 마셨다
풀코스를 뛰고 나면 정말 배가 고프고 한동안은 양껏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건 그냥 내가 먹돼지이기 때문일까
대회 직후는 먹고 싶은걸 뭐든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완주 후의 만족감은 기록과 별개로 언제나 행복하고 뿌듯하다
불과 일주일 전 완주에 실패하고 달리기에 소질이 없다며 쭈글 했던 기분이 이때만큼은 1등이 안 부러울 만큼 덩실덩실 행복하기만 했다
그리고 연속된 달리기에 적응을 한 듯 다리의 통증도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달리면 달릴수록 적응을 하고 나아질 방법을 찾아간다는 것도 이번 달리기의 소득이었다
끝난 대회지만 여운이 남아 대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어제의 대회에 대한 축하와 감사의 인사,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갑자기 벌컥 감정이 솟아올랐다
'2020년에 다시 만나요'
좋았던 기억들을 담고 기꺼이 내년 가을의 춘마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