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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는 곳이 집이지

우리라는 이름으로 살기

by 영롱할영

“함께 있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하니 지금 같이 있다는 게 너무 소중해.”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어릴 때부터 유학 생활을 하며 여러 나라에 걸쳐 살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꽤 오랫동안 불안한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친구를 만나 함께 살 집을 구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행복했다고. 친구도 그런 남편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뭉클하기도 하고, 이게 사는 재미였구나 다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왠지 계속 곱씹게 되었다. 이제 남편이 된 그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이유로 도망치듯 떠나온 내게 위로를 해주는 말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저 집이 너무 필요했을 뿐이라고. 급작스레 떠나온 나를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떠나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떠나기로 하고서도 몇 번을 더 고민했다. 그래도 결론은 지금만큼은 그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려면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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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떠나온 곳은 거제였다. 이곳에 살면서 변한 것이 꽤 많은데, 가장 큰 변화는 함께라면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구에서 나고 자랐던 10대 시절의 나에게는 언제나 서울은 대학교만 가면 꼭 살겠다는 도시였고, 끝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는 드디어 나도 TV에서나 보던 곳들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꽤 설렜다. 대학교 때에는 대학 생활을 서울에서 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지만, 직장을 다니게 되고 결혼을 생각하면서는 누구나 그러하듯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결국 경제적인 면이나 당시 내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지였던 경기도에 집을 마련했다.


그렇게 대구에서 19년, 수도권에서 13년을 살며 도시에 익숙했던 내가 남편을 따라 바다가 지천인 곳으로 오게 되었다. 남편 역시 경기도에서 평생을 자랐던 터라 평생 도시에 살았던 둘이 거제에 오게 된 것은 삶의 아주 큰 변화였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외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모든 게 새로운 이곳은 도시와 다른 환경으로 인해 불편한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누릴 것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와 말한 것이 있다. 함께 있지 않았다면 이곳에서의 기억을 지금처럼 행복하게 남기지 못했을 거라고.


여기서 배우는 것은 ‘간단하게 살아가는 것’, 가장 값진 원리이다. 하루를 단정하게 마무리하고 또 다른 아침을 맞는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불안이 잠시 스치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은 어느 무엇애도 도움이 된 적이 없다. 그냥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는 법, 그리고 순응하는 법, 무엇보다 하늘의 힘에 믿음을 보내는 법을 배우려 애쓴다.
_박성희, 『집의 일기』


우리가 가장 많이 다짐했던 건 '여유롭게 살아보자'였다. 물론 도시에서만큼 일자리가 많지는 않아서 지갑은 얇아지겠지만, 정서적인 여유는 빼앗기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돈을 아끼는 건 남편과 나의 생활과 소비 패턴이라면 가능했다. 크게 가리는 음식이 없으니 집에서 만들어 먹어도 좋았고, 바다가 잘 보이는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카페에 갈 일이 없어졌고,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어 옷이나 화장품을 살 일도 거의 없어졌다. 쉽게 말해 물욕이 많이 사라지는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도시에 살면서는 아무래도 만나야 하는 사람도 많아서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해야 하는 것들이 꽤 많았다. 나에게 집중된 삶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맞추어 사는 삶이 먼저였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온전히 해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시간들이 나와 남편 두 사람이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랐던 것. 우리라는 이름으로 ‘집’에서 살아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서로가, 또는 각자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때에 행복을 느끼는 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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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살면서 느낀다. 우리가 함께 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우리의 집이라는 것을. 어디에 살든 우리에게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라는 것.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는 건 사는 곳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겠다는 것.


때때로 이곳에서의 삶이 지루할 때도, 도시가 그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 때의 빡빡한 일상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던가 싶을 만큼 지금은 지금대로 또 편안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든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곳과 저곳 모두 우리가 적응하고 마음먹기 나름일 테니까.


솔직히 지금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정말 별것 없다. 맛있는 음식을 상에 두고 TV를 틀어놓고 웃고 떠들다가 누웠다가 얘기하는 것. 그러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드라이브 겸 나갔다가 산책하고 오는 것. 또 내가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남편이 퇴근할 시간에 맞추어서 그가 무얼 좋아할지 고민하며 저녁을 만들고, 그가 도착해서 '내가 왔다!' 하고 나를 안는 것. 이 모든 순간을 행복으로 치환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다고. 언젠가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조금 여유가 없어지더라도 그때 나름의 행복을 또 찾겠지 하고.


이전에 내게 정서적인 여유가 없을 때는 행복해지기 위해 특별한 이벤트들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어렵게 티켓팅한 공연, 손꼽아 기다리는 여름휴가, 웨이팅이나 오랜 예약 끝에 성공한 음식점으로의 방문, 혹은 몇 달간의 노력 끝에 만든 몸으로 바디 프로필을 찍는 일이라던가. 매일의 사소한 행복보다 어떤 특별한 이벤트들을 통해 행복과 삶의 이유를 찾았던 때의 나는 '지금만 조금 버티자'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때도 물론 하루하루의 조그만 행복들을 찾았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며 '매일의 지금을 기억하자'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됐다.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리워할 지금의 여유들을 몸에 아로새기며 한껏 누리자는 것.


그렇게 살아도, 꼭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우리답게 살 수 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도시에만 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인생의 가치들은, 생의 발견들은 또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킬지 모르겠지만 여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겠다는 마음만은 그대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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