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된 사진의 손맛
유산 징조로 힘들어하던 때였다. 남편 이름으로 온 택배에 1천여 장의 사진이 있었다. 신혼여행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남편의 시선으로 바라본 나의 행복한 모습들이 가득했다. 어째 내가 자신을 찍어준 사진은 거의 없고, 자신이 나를 찍은 사진들만 가득 뽑아온 남편. 마음도 몸도 움츠러져 있던 때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 속의 나를 바라보니 괜히 찡했다. 그래,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냈던 사람과 함께라면 지금의 힘든 일들도 같이 잘 견뎌낼 수 있겠지.
작년 추석에 유럽으로 2주 간 다녀온 신혼여행에서 우리는 6천 장 가까이 사진을 찍었더랬다. 언제 이렇게 길게 유럽으로 여행을 가겠냐면서 한 시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매분 매초를 누리며 곳곳을 누볐던 여행이었다. 길에서 빵을 먹을 때도, 그냥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사진으로 남겼다. 프라하와 피렌체에서는 사진작가에게 스냅사진을 맡기기도 했다. 이렇게 사진 찍는 걸 좋아했던 우리인가 싶을 정도로 매순간을 기록했다. 지금의 행복이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마음이 그때의 우리에게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매번 그때의 우리가 생생하게 생각나서 사진이 주는 힘이 대단하다고 새삼 느꼈다. 아무튼, 남편은 그때의 사진들 중 자신이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만한 사진들을 골라 1천여 장을 출력해왔다.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는 참 표정이 다채롭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이 좋으면 좋다고 입 밖으로 곧장 말하는 나는, 표정에서도 지금 느끼는 것들이 아주 금방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프라하 수도원 맥주집에서 한껏 맥주를 먹고 취하기도 하고, 아르노 강을 바라보면서 웃기도 하고, 젤라또를 손에 들고 기대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다뉴브 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뭉클해하기도 하고, 에펠탑을 보면서 에클레어와 맥주를 들고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나의 모습은 행복에 겨운 모습이었다. 물론 우리가 고대하던 유럽으로의 신혼여행이라 더 좋았던 것이겠지만.
10년 전에 혼자 떠난 유럽 여행의 루트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 신혼여행이었는데, 혼자 갔을 때의 사진들과 신혼여행에서의 사진은 표정부터 사진의 분위기까지 확연하게 달랐다. 혼자 떠났던 때는 훨씬 더 어렸을 때였음에도 왠지 모를 어두움이 있었는데, 남편과 함께 한 여행에서는 그곳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게 보였다. 결혼 전만 해도 혼자 떠난 여행도 좋다고 느꼈던 나인데, 이제는 남편 없이 여행하는 건 굳이 가고 싶지 않아진 걸 보니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재미있긴 한가보다.
사진을 화면 속에서 보는 것과 인화해서 보는 것은 다르다는 남편 덕분에 출력된 사진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찍어주신 사진 이후로 손으로 넘겨가며 사진을 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었던지. 이 사진 저 사진 늘어놓고 볼 수 있는, 인화된 사진이 가진 손맛을 새삼 느껴봤던 시간. 힘들 때 꺼내어볼 수 있는 공유할 추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앞으로 우리가 행복한 시간들을 더 오래도록 남겨야하는 이유를 다시 알게 해 준 시간. '반려자'라는 말의 의미를 매일 더 새롭게 느껴지게 만드는 이와 함께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