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임신이 유산으로 끝났다
이 글은, 우리에게 찾아왔던 꽁이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묻어두기 위한 글이다. 바로 이전 글의 제목이 '어머님이 아기를 보내주셨다'였는데, 바로 다음 글로 유산 이야기를 쓰게 될 줄이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일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라면 늘 노심초사하며 걱정 뿐일지라도 절대 생각해보지 못할 유산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병원에서 아기집을 처음 봤을 때, 아기집이 예쁘게 잘 자리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뻤다. 임신 사실을 빨리 알았던 탓에 아기집이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꽤 걱정이 많았다. 혹시나 자궁외임신이면 어떡하지, 임신수치만 오른 건 아닐지 등. 걱정과는 달리 아기는 내 자궁에 잘 안착했다고 했고, 내 몸에서도 임신에 의한 변화가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입덧이 시작되고, 많이 졸렸으며, 숨이 자주 가빠왔다. 이쯤이면 주변 친구들처럼 우리 아기도 무럭무럭 자라나겠지, 싶어 가족들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렸다.
남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태어날 아기는 부모뿐만 아니라 조부모, 친척들도 사랑을 줄 사람들만 있어 사랑받으며 자라날 테니 참 복 받았다 싶게 잘 키워보자고 손을 꼭 잡곤 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을 순 있어도 정서적으로 부족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자란 아이라면 제 몫의 행복을 챙겨가며 살아갈 거라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재미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친정 식구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오던 날부터 하혈이 시작되고 말았으니. 처음에는 어두운 피가 조금씩 나와서 착상할 때 났던 피가 고여있다 나온 것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하지만 이내 피는 점점 양이 많아지더니 색도 점점 새빨간 피로 변해갔다. 피가 나는 동안에는 도저히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바로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되도록 누워 있으라고 했다. 그래야 피가 그나마 흡수 될 거라고. 지금 정도의 출혈이라면 대개 잠시 있다 지나갈 테니 기다려보자고.
병원에서 우선 안심하라는 말을 듣고 왔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사과씨 크기에 불과한 아기라지만 내게는 '엄마'로서 이 아이를 꼭 지켜내고 말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일을 하는 중간에도 맘카페와 유튜브에서 '임신 초기 출혈'이라는 키워드로 등록된 것들은 모조리 읽고 찾아보았다. 그 동안에도 출혈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다행히 복통은 아직 없다는 것만이 내게 위안이었다. 유산의 대표적인 증상은 출혈 뿐만 아니라 복통도 있다고 했으므로. 하지만 나는 더 예민해져갔고, 움직이면 안 된다는 말에 남편은 내 옆을 떠나지 못하고 내 손과 발이 되어주기 바빴다.
출혈이 시작된 지 6일째 되던 날, 출근해서 앉아있는데 배가 은근히 아팠다가 괜찮았다 하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평소 생리통도 있긴 했어서 참을 수 있는 정도긴 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아이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을. 화장실에 갔더니 피가 후두둑 떨어지도록 출혈은 심해졌고, 덩어리 같은 피가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바로 병원을 가봐야 했겠지만, 남편이 퇴근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 가기에는 두려웠다. 혹시나 빈 초음파 화면만 보게 될 까봐. 출혈이 나는 동안 마음이 어느 정도 이런 일에 준비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건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아이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 나 때문일까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무서웠다. 좋은 생각을 하려 해도 내 몸에서 조금씩 임신으로 인해 왔던 변화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가슴이 더는 아프지 않았고, 입덧이 사라졌으며, 잠도 줄었다. 하지만 기도했다. 너만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다면 내가 더 아파도 좋겠다고, 그러니 부디 나를 잘 붙들어달라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아기집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작아져있었다. 선생님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하셨습니다. 주말 동안 푹 쉬시면서 지켜봅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의 뜻을 나는 알고 있었다. 주말 동안 마음 정리를 하고 있으라는 그 말을. 더불어 이 시기에 떠나가는 아이들은 대부분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유산이라, 아이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엄청 아플 거라며 지금 떠나게 되더라도 엄마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으며, 엄마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품고 있던 아이가 떠나가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나의 마음은 실로 무너져내렸다.
그날 저녁부터 출혈량은 더 많아졌고, 몇 번에 걸쳐 피가 아닌 것이 조금씩 보였다. 처음에는 멍하니 변기에 앉아있었다가, 내게서 나온 것이 내가 품고 있던 아이가 맞는지 살펴도 봤다가, 이내 눈물이 흘렀다. 처음에는 슬픈지도 몰랐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나와 누워있는 동안 점점 그 잔상이 머리를 맴돌았고, 지켜주지 못한 것이, 좋은 생각이 아닌 불안함만 심어준 것이, 이렇게 세상의 빛도 못 보게 하고 보낸 것이 미안해졌다. 그렇게 주말 이틀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남편에게 소리 지르면서 울기도 했다. 어머님이 가시고 난 뒤 바로 찾아온 아이여서 꼭 지켜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또 절망적이었다. 아버님까지 투병 중이신 이 때에 꽁이가 와 줘서 너무 고마웠는데, 이것마저 놓치게 된 현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 우리에게만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것인지, 남편과 부둥켜안고 몇 번을 울었다.
이틀 동안 그렇게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나의 자궁에 더는 아이가 자리잡고 있지 않은 게 맞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정말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