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 후벼파기

한강, <소년이 온다>

by 이재이



상처에 딱지가 앉을만하면 뜯어서 기어이 피를 보는 일,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면.






한 개인은 사회가 주는 폭력을 막을 수 있는가. 아니, 막는 건 둘째치고 피할 수는 있는가.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면. 가해자는 양지에 피해자는 음지에 있다면. 폭력이 대물림 된다면.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면. 무자비성, 불가항력을 동반한 잔혹한 폭력의 논리. 다 알면서도 그 폭력의 논리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면.


이를테면 폭력이란 그런 것이다. 지극히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것. 한강은 그 동물적인 감각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서술한다. 그 부분에서 독자와의 타협은 없다. 그래서 기어이 역겨움을 동반하고 만다. 감정을 덜어내고 잔혹함을 잔혹 그 자체로 건조하게 서술할 때 잔인성은 배가 된다. 아무렇지 않은 듯 쏟아내는 그 문장들은 퍽 폭력적이다. 어떤 페이지는 한 페이지를 읽는 데만 꼬박 3일이 걸렸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굵은 가시를 삼킨 것처럼 무언가 목에 턱 걸려 더 이상 읽어 나갈 수가 없었다. 실눈을 뜨고 간신히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최대한 문장을 곱씹지 않으려 노력하며 느슨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서는 어떤 장면이 상상됐고 구역질이 올라왔고, 속이 메슥거렸다. 다 불편했다. 속도, 마음도, 머리도. 나는 문득 내가 악몽을 꾸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그래서 이 독서 경험은 읽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간접)경험한 폭력의 기억이 되고 말았다.






폭력의 기억은 문신과도 같아서 피부에 새겨진다. 지우기 위해 레이저로 지져봐도, 문신이 있던 자리는 색소가 빠졌을 뿐 모양을 따라 음각을 남긴다. 완전히 지워내기 위해서는 생살을 도려내는 수밖엔 없다. 하지만 살을 도려낸다 해도 문신의 무늬가 사라졌을 뿐 이제는 살을 도려낸 흔적이 새로 생기고 만다. 어떤 모양의 문신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게 되더라도, 문신이 있던 자리는 영원한 상흔으로 남는다. 폭력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으로 어떤 폭력이 행사됐는지, 그로 인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세세하게 기억할 수 없게 되더라도 상처가 있던 자리는 영원히 박제되듯 피부에 새겨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감각이다.


색소가 빠졌어도 언제든 만져지는 문신의 음각처럼, 손만 뻗으면 언제든 폭력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고 철저히 느낄 수 있다. 영구히 재생되는 기억. 그래서 폭력은 더없이 잔인한 것이다. 피해자에겐 언제까지고 현재 진행형일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끝이 없는 '미래완료진행형'에 가깝다. 기약할 수 없는 미래까지 끊임없이 진행 중인 상태. 한강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고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되는 것이다.






폭력을 명령한 자, 행한 자, 당한 자가 있으나 이들이 모두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것. 제각기 다른 대상에 의해 희생되거나 이용되었다는 것.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되고, 일부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면, 시대의 피해자는 늘어난다.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한 자와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다"며 실제 폭력을 행한 자, 둘 중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더 잔인한가. 이 무자비한 야만성과 미개함 따위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인간애를 갖기란 좀처럼 어려워진다.


이 때문인지 작가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인간을 믿지 않게 된 김 양처럼, 일곱대의 뺨을 잊어야 하지만 이상하게 그 기억만 되살아 나는 그녀처럼 우리는 섣불리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지 못한다. 죽은 자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삶이 장례식이 되어버린 인물들. 제때 완전히 화장(火葬)하지 못한 폭력으로 얼룩진 기억은 삶 전반에 걸쳐 시체 썩은 내를 풍긴다.


결국 폭력과 잔인성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역설적으로 비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한 퇴행적 진화로 나아갈 때 비로소 비폭력적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지점에서 이들의 싸움은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인간 본질에 대한 투쟁으로 확장된다. 몇몇 인물들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의 생존 자체가 '치욕'이자 '죄책감'이 되는 이유다.






이쯤 되니 문학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강의 글은 기분 좋으려고, 시간 때우려고, 인류애를 충전하려고 읽는 글이 결코 아니다. 그녀의 작품을 읽는 건 자발적으로 폭력을 감각하는 일이다. 그래서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폭력을 직시하지 않으면, 상처를 더듬지 않으면, 따가워도 알코올로 소독하고 식염수를 때려 붓지 않으면, 상처는 곪디 곪아 구더기가 드글드글 끓고 결국 피부는 괴사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읽어야 한다. 기꺼이 읽음으로써 간접적로나마 폭력의 기억을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들이 있다고 집요하게 상기시키는 일. 어쩌면 다소 폭력적으로 폭압의 순간을 눈앞에 제시하는 일. 더듬더듬 상처가 있던 자리를 더듬어,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기어이 앉은 딱지를 뜯는 일. 딱지를 긁고 떼고 뜯어 생채기를 내고 피를 흘리는 일, 그렇게 기어이 피를 보고 여전히 멎지 않는 출혈로 붉게 피 흘림으로써 여기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고, 상흔을 증명해 내는 일.


하지만 이렇게 수동적으로나마 상처를 확인하고 비릿한 피 냄새를 맡는 게, 아직 피가 따뜻하단 걸 느끼는 게 최선인 걸까. 물론 딱지를 떼어냈을 때는 순간적인 통쾌함과 쾌감이 들지 모른다. 하지만 이내 붉은 피가 솟아오르고, 진득한 진물이 고이면 쾌감은 통각으로 변질된다. 문학도 단순히 고발에 그쳐선 안 된다. 그건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딱지를 뜯고 또 뜯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성실히 재현해 내는 것에서 나아가, 치유하는 데 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학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디까지인지 다시금 경건하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