띨릴릴,
“여보세요.”
“…….”
“나야.”
“왜.”
“영화를 봤어, 아주아주 지루한 영화를.”
“…….”
“그런 게 계속 생각나. 계속, 계속, 자꾸 생각나.”
하, 하고 작게 몰아쉬는 한숨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마이크에 너의 숨이 닿아서 옅게 부서지는 바람 소리. 마치 내 얼굴에 한숨을 내쉬는 숨의 온도가 느껴지는 듯했다.
“주말에 침대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같이 지루한 영화를 보는 거야. 보다가 둘 다 잠들어 버리는 거지. 그렇게 긴긴 낮잠을 자고 나서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쯤 부스스 일어나.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서 깜짝 놀라지. 그리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때문에 흐물흐물해져 버린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싱크대에 주르륵 따라버리면서 아이고, 또 잠들어버렸네, 하고 작게 혼잣말을 하면 그걸 들은 네가 스르르 눈을 뜨면서 잠이 깨. 그럼 눈이 마주친 우리가 마주 보고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짓는 거야.”
이야기하다 보니 아이스크림으로 기름진 싱크대 개수대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다시 얼리지 그래? 하고 네가 말하면 녹은 아이스크림 다시 얼려 먹는 거 아니야 하고 말하는 나를 보면서 예예, 알죠 알죠, 하고 대답하는 너. 우리는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로 아무렇게나 맥도날드, 버거킹, 도미노 피자 같은 데 전화를 걸어서 저녁을 시켜. 배고프다아 – 하면서. 주말 저녁 시간대라 다들 바빠. 40분에서 1시간 정도는 걸린대. 우리는 배달이 올 때까지 아까 봤던 영화를 마저 볼까? 하다가 아냐, 그냥 다음에 다시 보자. 하고 미뤄. 그리고는 침대에서 노닥거리면서 장난을 치다 초인종 소리에 후다닥 나가서 햄버거나 피자를 받아들곤 게으른 주말 저녁 식사를 하지. 그렇게 끝까지 못 본 영화가 몇 편이더라. 500일의 썸머, 조디악, 인터스텔라, 또……”
“마스.”
“어, 맞아, 마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그것도.”
“아, 맞다. 그것도 참 묘하게 지루했지.”
아주 잠깐 동안의 침묵-.
“난 니가 부르던 노래가 계속 생각나.”
“노래? 무슨 노래?”
“그냥 다, 다 조금씩 매일 생각 나. 특히 남자노래 여자 키로 바꿔 불렀던 것들 그런 게 많이 생각나.”
그랬던 적이 있었나. 나는 무슨 노래를 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한 곡 정도가 어렴풋이 생각날 듯 말 듯 했지만 이내 제목 기억해내기를 포기한다.
“맨날 남자 가수 목소리로 듣고, 내가 부르다가 니가 여자 키로 바꿔 부르면 와, 이 노래가 이렇게 들릴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곤 했어. 그냥 모든 노래가 니가 부르면 새롭게 들렸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녹음하고 평소에 듣고 그랬던 거야. 원곡보다 다 좋았어. 어울리면 어울리는 대로 안 어울리면 안 어울리는 대로, 음역대가 맞으면 맞는 대로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다 좋았어.”
맞다, 매번 내가 부르는 노래 녹음했었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너 기분 좋으면 항상 동요 불렀잖아. 그것도 자주 생각나. 말도 안 되게 가사 바꿔서 많이도 불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할 때나 날씨 좋은 날 밖에 산책할 때, 가끔 니가 옆에서 동요 부르고 있는 것 같고 그래.”
그렇다. 난 참 이상하게도 신이 나면 동요를 불러대곤 했었지. 매번 즉흥적으로 가사를 바꿨기 때문에 어떤 노래를 어떤 가사로 불렀는지 기억에 남는 건 딱히 없었다.
또 한 번의 얕은 침묵.
“그래, 이제 끊어야겠다.”
“그래.”
“다시는 전화하는 일 없을 거야.”
“나도 다신 받는 일 없을 거야.”
“응.”
띤 – 전화가 끊겼다.
늦은 밤이나 새벽이 아닌 대낮에 전화를 거는 이유는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지나치게 감성적이지 않은 상태라는 걸 굳이 티 내기 위해서이다. 이 전화가 그래도 비교적 안전-적어도 대성통곡을 한다든지, 이름을 부르며 징징댄다든지, 욕설을 퍼붓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할 거라는 그런 암시.
나는 매번 다신 전화하지 않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도 매번 다신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전화를 걸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는 온 힘을 다해 받지 않으려 노력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의 노력이 배신당하는 순간과 그의 노력이 배신당하는 순간이 공교롭게도 겹칠 때가 간혹 있었다. 아니, 꽤 숱하게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통화.
전화통화에서 우리의 목적은 대화가 아니다. 그저, 각자의 이별을, 각자의 순간을, 담담히 토로하면 그뿐이다. 우리는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솔직함은 ‘이기적 솔직함’이다.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솔직함. 이런 게 자꾸 생각나. 이번에는 이런 게 생각이 났어. 이런 게, 이런 일들이, 이런 표정이, 이런 말투가, 이런 상황이 생각이 났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이기적인 솔직함으로 무장한 채 각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은 채로 안전하다.
수화기 저편에서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그저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조금 잔인한가도 싶었지만, 그도 다른 이에겐 절대 해소할 수 없는 그만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랬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곤 통화가 끝나면 언제나 그렇듯 묘하게 위로받았다.
우리는 잘 헤어질 것이다. 이토록 부지런히 서로를 잊어갈 것이다. 서로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함께했던 순간들을 흩날리면서, 상대에게 다시 던지면서, 이랬어, 이랬어, 이런 것들이 있었어, 나는 혼자 있으니까 이래, 이렇게 말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견뎌낼 것이다.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울고 싶거나 슬프지 않다. 그때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행복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상대도 그럴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슬프고 초라하고 공허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때 그 아름다운 기억을 함께한 것이 사랑스럽고 고맙고 예쁘고, 그냥 그걸로 된 거다.
그때의 기억을 안고 있는 건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이 얘기는 다른 누군가에게 할 수가 없으니까. 아니, 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이렇게 0, 1, 0, 하나씩 하나씩… 이미 삭제해 핸드폰 전화번호부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내 머리가 아니, 내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는 그 번호를 더듬어 하나씩 하나씩. 마침내 통화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이 울리고, 눈을 질끈 감는다. 받았으면 싶다가도 받지 않았으면 싶기도 한 양가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영화를 보고 그와 깊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와 함께 ‘영화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영화를 보다 잠이 들든, 감동을 받든, 과몰입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든, 쓰레기 같은 영화라고 실망해서 욕을 하든 그냥 그저 그와 함께 그 시간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내겐 큰 행복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같이 영화를 볼 그가 내 옆에 없었다. 그와 다시는 함께 영화를 보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겠지.
일부러 지루한 영화도 보고, 스펙터클한 액션 영화도 보고, 아기자기 감성적인 영화도 봤지만 그게 어떤 영화든 장르나 내용과는 무관하게 별 재미가 없었다. 그 ‘순간’이 그다지 내게 있어 유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니가 부르던 노래가 가끔 생각나,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화가 목적이 아닌 통화에서 맞장구는 되도록 속으로 치는 편이 옳다. 통화가 길어져봤자 좋을 것이 없으므로. 네가 내가 너랑 같이 본 영화 이야기를 할 때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기만 했듯이, 나 역시 그냥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점심을 잘 챙겨 먹기를 바랐다. 하루종일 내 생각에 너무 빠져 있지 않길.
물론 너는 그럴 것이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또 그렇게 그렇게, 서로 잊고 지낼 것이다. 서로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12시, 정오다.
나는 핸드폰에 습관처럼 번호를 찍고 통화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민한다. 고민, 또 고민. 그냥 참을까.
그때, 지이잉-하는 진동과 함께 전화벨이 울렸다. 심장이 전화기 진동만큼이나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