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통화

by 이재이



"밖에 비 온다"


"그러게."


"뭐해."


"그냥. 넌?"


"난 떡볶이 먹고 있어."


"헐, 나도. 떡볶이 먹을 주기 돌아왔거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역시 그렇구나.


"나 요즘 골프 배워."


"어, 나도."


"그래?"


우리는 또 웃었다. 어이 없다는 듯이.


보고싶어, 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침묵이 감돌고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다신 전화를 할 수 없게 될까.


내가 두려운 건 수화기 저 편에서 '나도'라는 대답이 들려오는 것이 아닐까.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힘겹게 온 상황을

다시 허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선 안 되지.




"비 오는 날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또 좋아."


"어, 나도."


왜 이렇게 모든 대화가 '나도'로 종결될까.

근데 귀찮아서가 아니라 정말 '나도'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는 말들만이 오가고 있었다.



"요즘 부쩍 추워졌잖아."


"응."


"그래서 예전에 봤던 영화 다시 봐."


추워진 것과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냐고 묻지 않는다. 예전에 우리가 봤던 영화들은 감정이 몽글몽글해지는 따뜻한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식으로 너는 온기를 찾으리라. 너의 온도를 회복하리라.


"사실, 나도. 얼마 전엔 어바웃 타임을 다시 봤어."


"어, 나도."


이쯤 되니 다 거짓말 같다. 이렇게 다 나도, 나도, 나도, 하는 게.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안다. 우린 어쩔 수 없다. 그 오랜 세월 함께한 취향과 성향과 공통분모를 하루아침에 바꿀 순 없는 거니까.


그러려니 한다. 나와 같은 순간에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벅찬 일인지, 네가 내 옆에 없기 전 까진 이렇게 크게 느끼지 못했지. 나도, 라는 대답을 무수히 들으며 나 또한 '나도'라고 계속해서 대답하면서, 우리만의 우주란 게 있긴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 블랙홀처럼 그 우주에는 너무 큰 공동이 덩그러니 생겨버렸지만, 우주 전체가 소멸한 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궤적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우리는.


"어바웃 타임에서 아빠랑 탁구 치는 장면 있잖아. 거기서 아빠가 인생은 누구나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결국엔 늙어서 지난 날을 추억하는 것일 뿐이다. 결혼은 따뜻한 사람하고 하거라, 그런 말 하잖아."


"응."


"그거 지금 우리 상황이랑 되게 비슷하지 않아?"


"뭐가."


"우리도 평생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거 아닐까."


"좋았던 기억 너무 많으니까."


"그치."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그렇지."


"헤어진 건 헤어진 거니까."


"그치."


"결혼은 따뜻한 사람하고 해."


"너도."


"그래, 근데 각자 배우자가 생기면 이런 것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 이 반복은 이제 그칠 때가 된 거 같아."


"그래야지."


"근데 사실 자신은 없어."


"나도."


"오늘은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볼 거야."


"어, 나도."


"거기서 케이트 윈슬렛이 곧 내가 거슬리게 될테고, 난 당신이 지루하고 답답해질거라고, 그래도 괜찮냐고 물을 때 짐 캐리가 오케이, 라고 하는 장면 있잖아."


"응."


"그 장면을 한 10번쯤 돌려 볼 거야."


내가 항상 먹먹해지는 부분이었다.

오케이, 그 멍청하고도 대책없는 숭고한 선언.

'합리적인 사랑'이란 애초에 어폐가 있다. 이토록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인데.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지난한 여정을 되풀이 한다.


변하지 않아도 오케이, 또 고통이 반복돼도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기꺼이 다시 사랑에 빠지겠습니다, 오케이. 하지만 아임 낫 오케이. 나는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네가 너무 소중하고 애틋하고 좋은 사람인 걸 알아도 우리는 끝난 사이고, 더는 너를 사랑하지는 않으니까.

아임 낫 오케이,

쏘리.


"10번 씩이나?"


"응."


너의 대답은 심플하다. 나는 왜 10번이나 돌려볼 건지 묻지 않는다. 그저 나도 쿨한 대답을 되돌려줄 뿐.


"오케이."


"오케이, 그럼 나 이제 영화 볼래."


"오케이. 나는 한 숨 잘래."


"OK."





비 오는 오후,

나도,

오케이,

두 단어로 범벅이 된 대화는 간신히 끝이 났다.



후두두둑, 빗방울이 갑자기 거세졌다.

창가에 툭툭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런 통화는 다신 하지 말아야지.





나와 다른 곳에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네가

말하지 않아도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운동을 하고 같은 영화를 보고 있는 네가


걷잡을 수 없이 보고 싶어 지니까.




빗방울은 점점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