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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Jan 05. 2022

가난한 마음이 닳고 달아 남루해질 때까지




애초에 가난한 시작이다.

반쪽밖에 없는 마음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갈수록 야위어 간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가난해져 간다.



나는 마음을 흝뿌린다.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펑펑 소비한다.

그저 그렇게 마음 껏 탕진한다.


다 주어도 어떻게든 생겨나는 마음이 있다.

나는 계속 가난해져 가는데,

결코 배부를 수 없는데,

그래도 굶는 게 두렵지 않다.

배고픔을 잊는다.

빈 속임을 잊는다.

가난함을 너무도 쉽게 잊는다, 나는.


그런 것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이 닳는다.

날카로운 쪽부터 서서히.


모서리가 깎이고 뭉그러진다.

닳고 달아 남루해진다.

그래도 어떻게든 보존하려 애쓴다.

풍족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소중한 법이니까.


결핍이

소유에의 집착을 부른다.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결국 말장난에 불과한 것.


참 우습다, 생각하면서도

다행이다, 안도하는 내 초라한 마음이여.



살이 떨어져나가고

뼈만 남는다 해도

없는 건 아니다.


가난하다 하여

존재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존재 가치가 없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힘들 뿐이다.

없는 걸 붙들고 살기가

고단할 뿐이다.


아니,

힘든 것도 고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씁쓸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다 알았다는 것.

애초에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는 것,

대답이 없어도 목이 터져라 부르겠다고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다짐했다는 것,

기어코 가난해지는 이 지난한 과정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


그러니 나는 닳아도 싸다.



마음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의지만으로 결코 되지 않는 것,

기어이 끌려가고야 마는 것,

내 이성은 마음과의 저울질에 언제나 자리를 내주고 만다.



가난한 마음이 넝마가 되어 헤실헤실해질 때,

그러다 못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마침내 갈기갈기 찢기고 직조가 끊어져 나갈 때

나는 손을 빠져나가는

힘 없는 실오라기를 느끼며

가볍게 조소할테지.



그때쯤 너를 잊으리라.


 


아, 상쾌해.


더없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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