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야.
커튼을 열어젖히듯 꿈의 끝자락을 휙 걷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의 꿈을 꾸었다.
익숙한 그의 뒷모습이 재생된다. 그 뒷모습이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을 한다. 하염없이, 나에게서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걸어간다. 아니, 나아가지는 않으니 그저 걷는다. 아니, 멈추지 않으니 그저 걸어 댄다.
나는 손을 뻗어 그를 잡지도, 도로 뒤돌아 내 갈 길을 향해 걷지도 않은 채 멍하니 그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꿈. 숨 막히게 답답한 꿈.
그와 헤어진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런 꿈을 꾸고 있다. 잊을 만하면 꾸고, 또 꾸고, 또 꾸고. 간헐적이라기엔 들쭉날쭉하고 산발적이라기엔 연속적인 간격으로 이렇게. 불규칙적이나 꽤나 반복적으로.
그와 나는 서로의 첫사랑이었다. 중학교 때 알게 되었고, 사귀었고, 같이 20살을 맞았고, 정열과 낭만을 액세서리처럼 걸친 채 온 서울을 누볐고, 20대의 열정과 패기로 도전했고, 그와 동시에 필연적인 불안과 좌절을 겪었으며, 서울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직업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와중에 헤어졌다.
11년간의 연애였다. 서로를 제외한 사람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의 헤어짐이 정말 영원한 헤어짐이 될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정말로 이렇게 네가 내 인생에서 사라질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흔한 연애고, 흔한 이별이고, 모두의 연애이고 모두의 이별인데, 다만 어느 기억의 자락에서든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처음 그의 뒷모습 꿈을 꾸었을 땐, 반가웠다. 꿈속에서라도 잠깐이나마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러다 또 같은 꿈을 꿨을 땐, 야속했다. 이왕이면 앞모습으로 나타나 주지. 얼굴이라도 보면 좋으련만, 뒷모습만 주구장창 보여주다니. 그러다 몇 번 더 반복해서 꾸게 되자, 이젠 일상의 한 부분처럼 여기게 되었다.
어,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꼈네. 와 같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하늘을 확인하듯이. 그저 그렇게 아, 또 그 꿈을 꿨네 하고선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그런 아침들이 쌓여갔다. 역시 사람은 무서운 적응의 동물이다. 적응을 안 하면 또 어쩔 텐가, 적응할 수밖에.
그를 잊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그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 가면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무뎌지는 것, 그것이 나는 ‘헤어짐’이라고 여겼다. 그 헤어짐조차 의식하지 않는 것이 ‘이별’이라고 스스로 정의 내렸다. 그를 완벽하게 잊는 것이 이별이라면, 나는 영영 그와 이별할 수 없을 것이므로.
사랑만 하기에는 인생이 참 치열했다. 끝없이 경쟁해야 했고,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고, 그것이 청춘이든 사랑이든 예외는 없었다. 서울에 뿌리내리기란 영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내 영원 같은 사랑도, 10년이 넘게 내 곁을 함께 한 연인도, 이 서울살이 앞에서는 지켜내지 못했다. 또 그것이 그토록 위로받고 애석하게 여겨질 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련히 그런 것이니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음’을 연료로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므로. 이런저런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와 논리에 따라, 우리는 헤어졌다.
너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이었고, 나는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마지막은 ‘고시생 커플’쯤으로 정의하면 될 것 같다. 고시는 예상외로 길어졌다. 우리가 찬란한 미래를 그리던 20살 때,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26살에 우리는 각각 5급 공무원, 공중파 아나운서가 되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26살이 되었을 때, 너는 여전히 고시생이었고, 나는 공중파 공채 아나운서 시험 최종에서 낙방했다. 서로가 지쳐있었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슬럼프가 왔다. 우리는 우리의 연애가 과연 서로를 위한 것인지 의문을 품을 지경이 되도록 싸우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지쳐갔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이후 나는 1년 정도 길게 무력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험을 봤고, 20대의 마지막 아나운서 공채를 보고 난 후, 고향에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매번 최종에서 불합격하는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쉴 새 없이 달려왔으니 이번엔 결과야 어떻게 되든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 달 정도 꽤 길게 고향에 머무를 시간이 생긴 것이다. 최종 면접까지 치른 후 서둘러 KTX를 예매했다.
10호차 7A.
항상 예매하는 자리. 플랫폼을 따라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가운데 호차, 순방향, 창가 쪽, 충전기를 꽂을 수 있는 콘센트가 있는 자리.
집에 내려갈 짐을 꾸리면서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너의 편지가 가득 담겨 있는 편지함이었다. 5년 치는 본가에 보관하고 있었고, 20살 때부터 모아 둔 6년 치의 편지는 서울에 보관 중이었다. 너와 헤어진 후 박스에 넣고 아예 열어 보지도 않은 채로 방치 해두고 있었는데, 이제 이 편지들을 서울 집에서 빼고 본가에 가져다 두기로 한 것이다. 편지의 존재는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의 편지가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겠다는 관념’을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아예 이참에 내 공간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여러모로 소모적인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너의 편지들은 내 고단한 서울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버팀목인 동시에, 한순간에 무너지게 하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나는 네 편지를 읽으면서 어떤 날은 울고 어떤 날은 웃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기도, 모든 걸 놓은 채 한없이 무너지기도 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 편지들을 이제 모조리 서울집에서 몰아낸다. 숭고한 ‘처리’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드디어 아니, 마침내.
짐은 최대한 간단하게 꾸렸다. 하지만 네가 준 6년 치의 편지가 든 상자가 꽤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짐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편지함이 든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고 KTX에 올랐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서 신난 탓일까. 무슨 이유에선지 편지함을 열어 수많은 편지 중 하나를 무작위로 불쑥 꺼냈다. 헤어지고 나서 몇 년을 참았는데. 이 상자를 열지 않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정말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는데. 그 노력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도 쉽게, 순식간에, 생각 없이, 기어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것이다. 그리곤 편지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최소 3장은 되는 듯 꽤 두꺼웠다.
꺼내든 편지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