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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80세에 다시 독립한 CEO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그는 우리 회사 거래처의 대표였다.

그 회사는 독일회사의 한국 에이전트로서, 그 분은 모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60이 넘어서 한국 에이전트 대표로 임명되어 70대 중반인데도 여전히 좋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회사에 젊은 시절을 다 묻고 노인이 되어서까지 한직이지만 고용을 보장받아 그대로 근무하는 행운은 드문 일이다. 덕분에 그는 평생 평온한 인생을 살면서 아이들도 모두 잘 키우고, 부유한 처가덕분에 양평에 호화 펜트하우스를 짓고 산다고 했다.


50대 즈음, 그는 혈액암에 걸려 죽음의 고비에 선 적이 있단다.

그 당시, 처가에서 아파트까지 팔아 사위를 살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아내 사랑이 각별했고, 두 분은 노년에도 금슬이 좋아 골프와 여행을 즐기며 살고 계셨다. 천운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그를 기다려준 회사에 다시 복귀해서 70 중반이 될 때까지 근무하는 복을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 (이래저래 매우 관운이 있는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독일 본사에서 해고 통지가 날라왔다.

그가 구매업체로부터 수년간 비정상적 접대를 받아 온 사실을, 차기 대표이사 후보자인 바로 아래 부사장이

본사에 고발한 것이었다.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그런 것을 받아 오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크게 상관없었겠지만,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해고의 형식으로 자리를 떠나게 된다는 것에 그는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비리에는 실무에서 이를 묵인하고 동조한 회계 담당자까지 연루되어 있어, 그 부하직원까지 함께 해고되었다고 한다. 늘 사람 좋은 미소로 우리 회사에 가끔씩 놀러오시곤 했던 그 회계 담당자가 그런 일에 함께 관여했다고 해서 나는 무척 놀라웠었다.

17.2.jpg 출처 : 핀터레스트


그렇게 그는 평생 일해 온 회사를 떠났다. 남들은 50대에 떠나는 직장을 그는 거의 80이 다 되어서 떠나는 것인데도 그는 억울해하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렇게 은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경제적으로는 노후에 아무 문제가 없는 분이니 은퇴 자체가 무슨 큰 리스크는 아니셨을거고, 다만 훼손된 건 그의 명예일 뿐.



하지만, 얼마 있다가 매우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80의 나이에, 함께 해고된 그 회계담당자와 둘이서 거의 1인 기업인 신규 법인을 내고, 시내 한복판 고급 건물에 사무실을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80에 다시 회사를 오픈하고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업계 사람들은 다 놀라워했고, 노인의 노욕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침이면 변함없이 잘 차려입고 나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셨던 걸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은 80에도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 불멸초 같은 걸까?

나는 그의 새 도전이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욕심이라고 느껴졌다.

인생은 나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가 되었다면 뒤로 물러서고, 후배들에게 이 세상의 기회들을 양보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 죽겠다는 일부 초고령 배우들의 투지가 불편할 때가 있다.


그렇게 많은 행운을 남보다 많이 누리셨다면, 감사의 마음으로 잘 물러서시는 것이 맞다.

그랬다면 설사 그런 불미스러운 일로 떠나게 되셨다고 해도, 그 뒷모습이 애잔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쉬움...그 여백이 있어야 이 세상 모든 이별은 추하지 않다.

그는 그 여백을 너무 한 점 한 톨까지 없애버렸다.

17.6.jpg 출처 :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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