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머문다
고등학교 2학년 봄, 친구 집이 있던 서울 신림동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골목길 어느 담벼락 위로 라일락이 곱게 향을 날리던 계절이었지요. 2학년 중간고사를 준비한다고 방문했던 그 시간은 예외 없이 흐지부지 지나고 아직은 오후의 햇살이 잔뜩 남아 있던 시간 저는 140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어요.
영등포 즈음에서 봄기운에 기대어 잠시 꾸벅 졸다 눈을 뜨고 보니 저 앞 듬성 듬성하게 놓인 빈 의자들 중 한자리에 보라색 구슬로 뒷머리를 얌전하게 동여 맨 여학생 하나가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는 앉아 있었어요. 열린 창으로 봄의 햇살은 쏟아져 내리고 바람이 그녀의 윤기 나는 머릿결을 찰랑이게 만들었지요. 숫기 없는 소년의 마음은 흔들렸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덜컹댔고 저는 그 여학생의 뒷모습에서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누굴까? 어떻게 생겼을까? 몇 살일까?’ 사춘기에 접어 든 소년은 생각 하고 또 혼자 얼굴을 붉히기를 반복하다 내려야 할 정거장이 아속하게 다가 왔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채비를 하면서 얼굴이라도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내려야 할텐데……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 것은 숫기 없던 소년의 변명일겁니다.
아주 아주 가끔은 그 때를 한 번씩 기억합니다. 그것이 비록 저의 첫사랑은 아니었다 해도 설렘 가득했던 첫사랑의 느낌은 이런것이 아니었을까? 사춘기 소년이 꿈꾸던 첫사랑 소녀에 대한 기대는 이런것이 아니었을까? 우연히 들어 선 낯선 동네의 어귀를 걸어 길모퉁이를 돌면 반쯤 열린 어느 집 창가에 앉아 얼굴 하얀 소녀가 창밖으로 제게 미소를 보내는 그런 느낌 말이죠.
2016년 봄 어느덧 나이만 먹어 버린 저에게 지난 얼마간의 시간 동안 당신이 주셨던 설렘은 저를 저 먼 시간의 강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다시 따사롭던 봄날의 그날 버스에 태웠습니다. 얼굴 모르는 소녀의 뒷모습을 남몰래 바라보며 가슴속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꼬옥 조바심을 내던 한 소년의 시간이죠.
흘러간 강물 위로 띄워 보낸 어린 날의 종이배처럼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그런 설렘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당신을 ‘너무 괴롭다고 빨리 이 어두움이 걷히게 해 달라고, 어서 이 비바람을 저로부터 걷어가 달라’고 떼를 부리던 제 아이같은 투정에 대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희망의 무지개라고 생각 하겠습니다. 비겁해 지려할 때 용기를 잃지 않고 무릎 꺾이려 할 때 희망을 잃지 않으며 망설여 질 때 진실의 편에 서고 약한 자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잠시나마 제 옆에서 제 손을 잡고 한동안 넘어져 어쩔줄 몰라 했던 저를 일으켜 세워 주신, 이름 모를 누이 당신처럼 말이죠.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당신.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