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망울. Bokeh.. ぼけ...
'료스케' 군이 간사이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와 주었다. 초행길이라 택시를 타고 가겠다 했지만 굳이 공항까지 나와 주었다. 료스케 군과는 2년 전 겨울 경주에서 전주까지 함께 동행하며 일을 한 인연이 있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 한옥마을 인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서 전동성당 앞 찻집에서 커피를 한잔 하고 있을 때 그는 기회가 되면 교토에 꼭 한 번 방문해 달라고 했다. 가을 단풍이 무척 아름답다고 그가 이야기했지만 나는 결국 사월에 교토를 방문하게 되었다.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해서 그가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 한 장을 건네주며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일전 전주에서 대접받은걸 갚겠다고 해서 싱긋이 웃고 말았는데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 방으로 전화가 왔다. 료스케 군이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 입고 숙소 로비로 지금 내려오라고 했다. 함께 탄 택시가 도착한 곳은 교토 인근 간판이 크지 않은 식당이었다. 소박해 보이는 외형이었지만 식당 입구에 적힌 안내문에는 1817년 개업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다다미가 가지런히 깔린 방으로 안내되었을 때 료스케 군이 나이 든 급사에게 미리 예약해 둔 음식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하자 급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 차가운 청주와 함께 몇 개의 접시들을 내어 왔다. 도미와 갯장어 그리고 고등어 등을 숙성하여 전통 방식으로 초절임을 한 초밥이었다. 함께 나온 생강절임과 함께 입 안에 넣자 부드러우면서 깔끔한 맛이 퍼져 나갔다. 그와 술잔을 나누면서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가 계산을 치르고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느라 벌써 몇 병의 차가운 청주와 맥주를 비워 낸 탓인지 취기가 올랐다. 료스케 군과는 내일 헤이안 신궁에 벛꽃구경을 가기로 약속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기다리던 료스케 군으로부터 기별이 없어 걱정이 되었다. 열 시를 막 넘겨 그가 전날 건넨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으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혼자 나가야 할까 싶어 숙소에서 외출 준비를 막 끝냈을 때 방으로 전화가 왔다. 로비로 내려오라는 전화였다. 료스케 군인가 싶어 반가움 반 걱정 반으로 바삐 내려갔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단아한 인상의 젊은 여자가 내 이름을 확인했다. 료스케 군이 아침 일찍 시코쿠현으로 예정 없는 출장을 가게 되어 부득이 오늘 안내를 맡게 되었다고 전한 그 여자는 이름이 '아이리'라고 했다.
다소 얼떨떨한 만남이었지만 아이리의 밝은 성격은 환한 벚꽃을 바라볼 때처럼 차츰 사람을 들뜨게 했다. 우리는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사가노 토롯코 열차를 타러 갔다. 아라시야마와 카메오카 사이의 벚꽃길을 왕래하는 관광열차였다. 돌아오는 길에 도게쓰교를 거쳐 찾아 간 기요미즈데라(청수사)는 봄 시즌 한시적으로 야간개장을 하고 있었는데 조명에 반사되는 벚꽃잎들의 물결이 밤의 장막을 환하게 만들었다. 내일은 은각사를 방문하기로 일정을 약속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망설이다 들른 선물 가게를 몇 군데 기웃대다 마음에 드는 우산 하나와 초 두 자루를 구입했다. 상큼한 라임 빛깔의 우산이었는데 착착 접혀서 간편하게 줄어드는 크기였다. 초는 절을 방문할 때 혹시 필요할지 몰라 구입했다.
다음날 만난 아이리는 은각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외견이 화려한 금각사에 비해 가을 정원이 아름답고 상대적으로 소박해 보이는 은각사가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와 나는 문이 닫을 시각까지 절의 이곳저곳을 함께 돌아보았다. 절을 나서면서 내일 오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아이리가 저녁시간을 함께 하자고 했다. 은각사 인근 정원이 아름다웠던 찻집에 들러 간단히 요기할 거리와 맥주를 주문했다. 하늘이 흐려서인지 금세 날이 어두워졌다. 맥주를 두어 잔 마시고 있을 때 정원의 연못으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내가 아이리에게 접이식 우산 하나를 건네자 그녀가 잠시 멈칫한 표정을 지었다. 전날 구입한 우산이었다. 나는 아이리에게 밖에 비가 오고 있는데, 우산은 가지고 왔는지 물었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상의 주머니에서 초를 두 자루 꺼내어 불을 붙이자 나와 아이리 사이의 거리가 한결 더 따스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촛불을 한 동안 바라보았다.
내가 아이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하다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리가 떠나고 난 자리에 혼자 남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초의 가장자리를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몇 차례 꾹 꾹 눌러보았다. 잠시 후 아이리가 들어와 방긋하니 웃고 있었다. 두 자루 초가 타는 불 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한결 화사해 보였다. 나는 아이리가 방금 화장을 고치고 온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별 다른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많은 인연이 있지만 그녀와는 이 만남이 결국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만한 나이였다.
밖으로 나오자 사월의 안개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은각사(긴카쿠지)에서 남선사(난젠지) 까지 우리는 비와 호 수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수로를 따라 수양벚꽃(겹벚꽃) 나무가 끝없이 이어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꽃잎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수로가 끊긴 막다른 자리에서 연두색 우산을 한 손에 든 아이리와 나는 서로 악수를 하고는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와 시계를 보자 자정이 이미 지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밤새 봄비가 '툭. 툭. 툭' 떨어지는 소리를 뒤척거리며 들어야 했다. 창을 통해서 굴절된 빛의 망울이 천정에 아른아른했다.
나중에 아이리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의 이름이 '철학의 길'이라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어렴풋이 들었을 때,
세월이 지난 후 단풍 드는 계절에 그 길을 꼭 한 번 다시 걸어 보자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