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인간적인 사회복지사의 낭만에 대하여
낭만닥터 김사부
나는 평소에 잠을 좀 일찍 자는 스타일이어서 밤10시가 넘어서 하는 평일 드라마를 잘 챙겨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드라마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어서 입소문이 난 드라마는 주말 재방송으로라도 챙겨보는 어설픈 드라마광(?)이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은 어쩌면 온 국민의 절반이 본다는 주말연속극이 딱 맞는 수준인 것 같다. 그런데 백수가 된 요즘 나는 드라마 한 편에 푹 빠져 살고 있다. 바로 SBS월화드라마인 <낭만닥터 김사부2>다. 백수라서 남는 게 시간이라 안 보던 드라마까지 챙겨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낭만닥터 김사부>는 3년 전 제주도에 처음 내려와 주말에 혼자 집에 있을 때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나름 추억의 드라마랄까. 이 드라마는 주인공인 배우 한석규(김사부 역)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명대사가 압권이었었는데, 이번에 하는 시즌2에서도 그때의 배경이 된 돌담병원 사람들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좀 더 친숙하게 드라마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김사부>가 하는 월요일, 화요일 밤에는 약속도 잡지 않고 무조건 본방사수를 하고 있다.
오랜만에 나의 드라마 감성을 깨운 <낭만닥터 김사부2>가 최근 시청률 20%를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원래 의학드라마와 같은 난해한 장르의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편이었다. 지금까지 시청률이 이 보다 더 높았던 의학드라마들도 많이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의학드라마에는 어려운 의학용어들이 많이 나오다 보니 영어로 된 용어해설 자막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기 일쑤였다. 그랬던 내가 <낭만닥터 김사부>는 재미있게 잘 보고 있다. 의학드라마라고 해봐야 진부하고 뻔한 스토리일 법도한데, <낭만닥터 김사부>는 시즌2까지 나올 정도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다른 의학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가보다.
낭만과 사부
의학드라마라고 하면 대체로 별의별 환자들의 사연들과 함께 의사들의 고충이 더해지는 휴먼드라마이거나 아니면 거기에다가 병원 내 권력다툼, 그리고 약간의 로맨스가 추가되는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낭만닥터 김사부>는 의학드라마이지만 좀 더 색다른 맛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드라마의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낭만’과 ‘사부’에 있다. 의학드라마에서 굳이 ‘낭만’이라는 표현을 ‘닥터’ 앞에 덧붙였다는 것은 제작자의 특별한 의도가 분명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드라마 속 ‘김사부’는 ‘부용주’라는 본명이 따로 있는 인물이다. ‘부용주’가 ‘김사부’가 된 사연은 시즌1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부용주’는 한 때 거대병원에서 잘나가는 외과의였지만 불의에 맞서 싸우다 홀연히 업계를 떠난다. 그랬던 그가 강원도 산골의 돌담병원이라는 곳에서 스스로를 낭만닥터라 칭하며 은둔생활을 즐기는 괴짜 의사로 다시 나타난다. 그가 가진 수준 높은 의술과 물불 가리지 않는 정의감, 그리고 무뚝뚝한 겉보기와는 달리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물로 병원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 그를 ‘김사부’라고 부르고 있다.
드라마가 ‘닥터 부용주’라는 인물을 ‘김사부’라는 괴짜의사로 신분을 세탁하여 부르는 이러한 설정은 아마도 이 드라마가 현실세계의 병원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할 병원과 의사들이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여 환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현실은 이미 거대한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냉정한 세상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돌담병원을 배경으로 그 곳에서 인술을 펼치는 ‘김사부’라는 비현실적인 인물의 존재는 그 자체로 현 세태를 꼬집고 있다. ‘사부(師傅)’는 말 그대로 ‘스승’을 뜻하는데, 이 드라마는 ‘김사부’라는 인물을 통해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가치를 깨닫게 하고 따끔하게 훈계를 해주는 진정한 시대적 스승의 필요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다.
김사부의 존재만큼이나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낭만’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 속 ‘김사부’는 스스로를 ‘낭만닥터’라 칭한다. 오래된 카세트로 올드팝을 들으며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삶을 추구하며 사는 모습만으로는 김사부의 낭만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모름지기 의사라면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것, 힘없이 나약한 ‘을’의 입장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 또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선택한 행위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 마땅히 의사가(또는 인간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본분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불합리하고 비겁한 현실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 바로 ‘김사부’의 낭만이 아닐까 싶다. 비록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낭만이지만......
사회복지사에게 낭만이란
나는 사실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는 삶에서 낭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노랫말 가사에서처럼 비오는 날 혼자 선술집에 앉아 옛날 노래를 들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 낭만이라고 상상했을까. 그런데 나는 요즘 ‘김사부’를 통해 낭만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각자가 마주한 현실과 드라마 속 이야기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사회복지사의 삶과 또는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드라마 속 돌담병원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사회복지는 언제부터인가 본래의 가치를 점점 잃어가고 있고, 기득권층은 정치에 줄을 서고, 내부적으로는 알량한 권력다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나 같이 힘없는 사회복지사들은 이렇듯 비겁한 현실 속에서 항상 ‘을’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사회기득권의 횡포와 불의를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그놈의)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못 본 척, 못 이기는 척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라마 속 돌담병원 사람들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김사부와 같은 리더를 중심으로 서로 힘을 합쳐 거대 권력과 불의에 맞서 당당히 싸워 이긴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언제나 최우선인 것이 현실이다.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김사부’와 같은 사람은 없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낭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의 정의감 혹은 김사부가 보여주는 낭만 따위의 것들을 현실에서는 무모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그러한 무모한 낭만을 언제나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현실에는 없지만 드라마 속에는 있는 김사부의 낭만을 통해 대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혐오의 시대, 그리고 낭만
드라마의 제작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을 혐오의 시대라고 말한다. 보수와 진보, 금수저와 흙수저, 갑과 을, 주류와 비주류, 심지어 남자와 여자에 이르기까지...... 씁쓸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제작자는 이러한 혐오의 시대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소신 있게 끝까지 지켜나가는 ‘김사부’라는 인물을 통해 민중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낭만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는가 보다. 매일매일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먹고 살기에 바쁜 사회복지사들이 다들 쉬쉬하고 있어서 그렇지 사회복지분야도 혐오의 시대이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나처럼 무턱대고 낭만을 쫓다보면 백수신세를 면하기 힘든 것도 인정하기 싫지만 이 바닥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후회는 없지만 처자식까지 딸린 백수에게 낭만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불편하다고 무릎 꿇고, 문제 생길까봐 숙여주고, 치사해서 모른 척 해주고, 더러워서 져주고... 이런저런 핑계로 모든 것이 쉬워지고 당연해지면 넌 결국 어떤 취급을 당해도 싼 그런 싸구려 인생사는 거야! 알아들어?”
오늘따라 김사부의 이 말이 유난히 뼈를 때린다. 나에게는 과연 낭만이란게 있기는 한 걸까. 적어도 한 인간으로서, 또 사회복지사로서 싸구려의 삶을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쉽진 않겠지만 이제라도 내 삶에서(+사회복지사) 잃어버린(아니 원래 없었을 수도 있는) 낭만이라는 것을 한 번 찾고 싶어 진다. 앞으로 이 바닥에서도 낭만복지사 김사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또한 쉽지 않겠지만......;;)
... 찾고 싶다. 그 낭만이라는 것... 알쓸복잡
*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님의 PD저널(http://www.pdjournal.com) 칼럼의 일부 내용을 발췌요약 하였습니다.
*사진출처: <낭만닥터 김사부2> 드라마 포스터
이 시대에 죽어가는 소중한 가치들, 촌스럽고 고리타분하다고 치부되어져가는, 그러나 실은 여전히 우리 모두 아련히 그리워하는 사람다운, 사람스러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번 드라마에도 가득 채워질 것이다. 혐오가 아닌, 마땅히 존중하고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며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살고 있는지 길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아름다운 김사부의 낭만을 전하고 싶다.
- <낭만닥터 김사부> 기획의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