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전

세상 모든 단어에는 사람이 산다

by F와 T 공생하기

서울공예 박물관에는 도서실이 있다.

공예를 비롯한 예술에 대한 많은 도서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역사 관련 도서들도 많다.


오래간만에 흥미진진하게 눈에 띄는 책들을 모아다 즐거이 읽어나갈 수 있었다.


카피라이터 정철 작가의 '사람 사전'은 카피라이터다운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는 책으로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많은 단어들에 담긴 사람, 인생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가구
큰 집을 작은 집으로 만드는 물건. 우리는 공식처럼 안방엔 침대, 거실엔 소파, 주방엔 식탁을 모신다. 적지 않은 돈을 써가며 서른 평 집을 단숨에 열 평으로 줄여버린다. 그러곤 흐뭇해한다.


남들이 보면 한 사람. 내가 나를 보면 두 사람, 나는 조용하고 시끄럽다. 나는 교만하고 겸손하다. 나는 따뜻하고 쌀쌀맞다. 나는 분주하고 한가롭다. 나는 용감하고 비겁하다. 나는 착하고 악하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분명 두 사람. 늘 한 사람인 척 차표 한 장 끊고 인생을 여행하는 두 사람.


단어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수험생과 그 가족에게 고생이라는 단어를 안긴다. 박수다 격려다. 응원이다. 나도 한마디 건네야 한다. 남들과 똑같이 말하기 싫어 고생 말고 다른 단어를 찾는다. 찾는다. 찾는다. 결국 이렇게 말한다. 고생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용한다는 건 비숫비슷한 것들과의 경쟁에서 졌다는 것. 공감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뜻.


라면
내가 재벌 딸로 태어났더라면. 강동원 얼굴로 태어났더라면. 이런 라면 맛있을까. 장담하건대 맛없다. 머릿속에 스테이크가 놓여 있는데 라면 따위가 맛있을 리 없다. 소망도 너무 멀리 가면 되돌아오는 길이 고달프다.


리더쉽
리더가 갖추어야 할 역량. 모두 열 가지리서 리더십. 지도력. 집중 력. 추진력. 통솔력. 상상력. 통찰력. 인내릭. 창의력, 응집력, 친화력. 이걸 다 갖추면 그게 신이지 사람이 나고 묻고 싶겠지, 실은 나도 묻고 싶다. 오랜만에 생각이 통한 것 같아 반갑다. 그런데 리더는 이래야 한다는 책, 책, 책들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 열 가지가 맞다. 결론은 그런 책과 친해지지 말라는 것.


마음
몸의 주인. 마음이 시키면 몸은 한다. 뭐든 한다. 뜨거운 사랑도 하고 차가운 이별도 한다. 총칼을 쥐어주면 전쟁도 한다. 몸은 죽는 날까지 마음을 행한다. 몸이 마음을 거역하는 사건은 일생에 딱 한 번. 마음은 죽고 싶지 않은데, 마음은 하루만 더 살자고 하는데 몸
이 이를 거부하는 사건. 반항이 아니라 충심이다. 몸은 자신이 늙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이 늙어 추해지는 꼴은 차마 보지 못한다.


바쁘다
틈이 없는 상태. 똑같이 바쁜 두 사람이 틈이 없다고 말한다. 한 사 람은, 쉴 틈이 없다. 또 한 사람은, 지루할 틈이 없다. 같은 틈이지만 같은 틈이 아니다.


사랑

같이 있어 주는 것.

같이 걸어 주는 것.

같이 비를 맞아 주는 것.

같이 울어 주는 것.

같이 웃어 주는 것.


이 모든 문장에서 '주다'라는 개념을 빼면 사랑.


사랑은 같이 있는 것.

같이 걷는 것.

같이 비를 맞는 것.

같이 우는 것.

같이 웃는 것.



사실
진실과는 늘 약간의 거리. 사실이 진실에 닿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게으른 관찰. 섣부른 결론.


아빠
아버지의 역사 첫 페이지. 본문이 시작되기 전 머리말 같은 것. 이어지는 본문이 얼마나 어려울지. 얼마나 외로울지 아직은 모두 다 오래오래 모르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없다. 곧 본문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게 쉽지 않은 본문이다. 어려워도 읽어내야 하는 본문이다. 지겨워도 건너뛸 수 없는 본문이다. 아빠는 짧고 아버지는 길다.


아우
위에 형이 있는 녀석. 형에게 눌려 주눅 들 만도 한데 오히려 형보다 씩씩하다. 거리낌도 없고 조심성도 없고 조바심도 없다. 첫 문장을 바꾸는 게 좋겠다. 등 뒤에 형이 있는 녀석.


자랑
입 밖으로 내보내면 자랑으로 끝, 꾹 참고 입에 물고 있으면 자신감으로 진화. 자랑하고 싶은 세 가지가 있다. 자랑하는 순간 자랑은 허공에 잠시 머물다 산산이 부서져 사라진다. 그러나 자랑하고 싶은 순간을 참아내면, 나는 너희가 모르는 자랑거리를 셋씩이나 지닌 사람이 된다.


커피
눈이 마시는 음료. 우리는 입으로 액체를 마시며 동시에 눈으로 그 진한 색깔을 마신다. 커피의 진함 속엔 추억, 설렘, 용서, 차분, 응원 같은 것들이 고요히 스며들어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숨어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추억을 마시는지, 누가 설렘을 마시는지, 누가 용서를 마시는지 알 수 없다. 각자 다른 이유로 마시는 같은 진함. 이것이 커피의 잔잔한 매력이다. 만약 커피가 투명한 색이었다면 지금처럼 넓게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타협
나는 내 의견 밀어붙이는 일에 실패하는 것. 너는 네 의견 밀어붙이는 일에 실패하는 것. 둘 다 실패함으로써 둘 다 성공하는 것. 내 의견이 죽어 우리 의견이라는 더 큰 모습으로 살아남는 것.



자신이 백합과에 속한다는 것을 숨기고 사는 풀. 한 떨기 백합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순결한 표정으로 꽃병 속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니까. 더는 찌개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영원히 사람들 입을 즐겁게 해 줄 수 없으니까. 오늘도 그는 자신이 백합과가 아니라 조리학과 출신이라 우기며 찌개에 몸을 던진다. 폼 나는 일, 우아한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에 인생을 쓴다.


학생
한자 뜻 그대로 풀면 배우는 인생. 학교 가는 인생이 아니라 배우는 인생. 배워야 할 것은 학교 밖에 더 많으니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가 진짜 학생. 살아 있다면 학생. 죽는 날까지 학생.


한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는 것.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 것.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말하는 일이다. 한계는 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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