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를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하는 건 아니다.
“또 도서관 가는 거야?”
도서관을 갈 때마다 가끔 들었던 말이다. 공부하려고 가방을 싸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몇 걸음 가다 보면 일요일마다 가는 교회 앞을 지나간다. 항상 교회 앞 벤치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난 이 말을 듣기 싫어서 교회 앞이 두려웠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그냥 무시하고 가야 하나 항상 고민했다.
대학을 졸업했어야 하는 나이에 대학을 가기 위해 도서관에 가는 내 모습. 항상 웃으면서 인사를 했지만,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긴장됐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나를 평가한다고 생각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 마치 일반 무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난 남들보다 긴 수험생활을 했다. 대학 입학이든 교사 임용시험이든 한 번에 된 일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수능 전날은 가슴이 뛴다.
수능 공부했던 당시에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수능 점수였다.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기간에는 합격의 여부가 나를 평가했다. 결국, 시험 결과가 내 삶을 평가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는 시험 점수로 아이들을 평가하지만, 10년 후에 이 아이들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시험이라는 기준으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교사가 된 후, 몇 년 전부터 학부모 총회에서 이런 말을 꼭 한다. 학부모들은 이 말을 들으면 맞는 말이긴 한데,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다. 대학 입학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 이 말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주로 있다 보니까, 졸업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취업하는 모습을 본다. 가끔 술을 사준다고 찾아오는 제자들도 있다. 물론 내 지갑에서 돈이 나가지만. 찾아오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고등학교 때 국영수 점수가 인생의 점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갖는 것도 좋지만 나에게 웃으면서 찾아오는 학생들은 꼭 그런 아이들은 아니었다. 작은 일에 만족했고 조급하지 않았던 아이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 말을 했던 아이들. 친구들이랑 쉬는 시간에 매점 빵을 먹으러 전력 질주했던 아이들.
인생의 평가를 시험으로 생각하는 학생이 많다. 나 또한 그랬다. 이 생각은 어느 사람이든 한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을 다녔던 옛날의 나는 더 심했다. 만약 내가 다른 시험을 도전한다면 시험의 결과에 다시 민감할 것 같다.
하지만 옛날과는 조금 달라진 게 있다. 이 시험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으로 나를 평가하기에는 내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과거에 도서관을 다녔던 나에게 말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싶다.
“현재의 모습이 너의 전부가 아니야. 지금의 기준으로 너를 평가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