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러 컵라면 열아홉 개를 샀다. 토요일이면 가끔씩 과자 파티나 컵라면 파티를 했다. 오늘은 아이들이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집중을 잘했다.
컵라면의 종류는 다양했다. 육개장, 김치사발면, 신라면, 안성탕면, 너구리, 사리곰탕, 새우탕, 오징어짬뽕 등등. 아이들이 라면을 고를 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어떤 라면을 먹을지 저마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한 다음 원하는 라면을 잡았다. 수요가 많아 경쟁이 붙으면 가위 바위 보로 정했다. 내가 미리 찜했던 사리곰탕은 동이 났다. 달랑 남은 한 개는 너구리다. 너구리는 면이 오동통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가위 바위보를 할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되었다.
다음은 컵라면을 싸고 있는 얇포름한 비닐을 벗기는 일이었다. 비닐은 컵의 밑바닥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살살 벗기는 일이다. 홍준이는 이 방법을 쓰지 않고 나무젓가락으로 컵의 밑바닥을 박력 있게 찌르는 바람에 컵라면 바닥까지 뚫리고 말았다. 컵 바닥의 비닐은 거의 진공 상태처럼 되어 있어서 나무젓가락을 꽂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닐을 관통하는 쫀득한 손맛을 느낄 수 있다. 홍준이는 아마도 이것을 기대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야,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아이고 조심 좀 하지.”
“······.”
친구들이 저마다 홍준이한테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홍준이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어졌다. 나는 순간 내 라면을 양보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모른 체하고 홍준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라면의 비닐을 벗겼다.
다음은 물 붓기 순서. 열아홉 개의 컵에 물을 붓는 작업은 전적으로 내가 맡았다. 뜨거운 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컵라면 밑바닥을 뚫지 않도록 하는 일보다 몇 배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물을 부을 때도 집중해야 한다. 컵의 안쪽에 있는 선만큼 물을 부어야 하는데 선을 넘거나 선보다 적게 부으면 누군가는 싱거운 라면이나 짠 라면을 먹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자, 줄을 서시오.”
아이들이 내 앞에 줄을 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에 맞춰 물을 붓는다. 여덟 번째로 홍준이가 내 앞에 컵을 들이밀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하느라 잠시 홍준이를 잊고 있었다.
“와우!”
“야! 홍준이 진짜 대단하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이런 방법으로 컵라면을 먹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일 테니까. 홍준이의 얼굴에 섬광처럼 미소가 스쳤다.
홍준이는 컵라면의 밑바닥을 가위로 완전히 뜯어내고 뒤집어서 그 곳에 물을 부어 먹기로 한 것이다. 라면의 아래 위가 바뀌어 버렸다.
“와! 이렇게도 먹을 수 있는 거구나!”
홍준이의 기발한 순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내 라면이랑 바꾸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맛이 특별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내 라면 에 물을 부었다.
라면이 익는 시간 3분. 기다림의 지루함을 단축시키기 위해 둥글게 앉아 끝말잇기 게임을 했다. 내가 먼저 감자로 운을 뗐다. 자전거, 거미, 미숫가루, 루돌프로 이어졌다. 다음은 영준이 차례다.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자 낱말의 궁색함을 느낀 영준이가 말헸다. '푸른 바다' 이쯤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푸른 바다와 '프른 바다'의 논쟁이 일어나고 여기서 끝말 잇기는 끝이 났다. 라면이 영준이를 도운 셈이었다.
라면을 먹는 시간 동안에 교실은 한없이 고요하고 후후~~후루룩 쩝쩝 소리만 들렸다. 거의 다 먹어갈 즈음 갑자기 군대의 기합 소리처럼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짧고 단호한 소리가 쩌렁 울렸다. 홍준이의 다부진 체격이 크고 힘이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과자 먹고 싶은 사람 무릎 꿇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빛의 속도로 홍준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차했으면 나도 무릎을 끓을뻔했다. 홍준이의 손에는 사물함에서 꺼내온 과자가 든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를 들려있었다. 과자 파티는 예정에 없던 일인데 읍에서 마트를 하는 홍준이가 과자를 한 보따리 챙겨 온 것이다.
그 어떤 아이도 홍준이의 '무릎 꿇어' 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홍준이가 가져온 과자는 동이 났고 아이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친구들이 눈치 채지 않게 홍준이를 불렀다.
“홍준아, 친구들 주려고 과자를 챙겨 와서 고마워. 그런데 아까 네가 친구들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친구들이 내 과자를 공짜로 먹으니까 그렇게 한 건데요”
“그렇구나.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어떤 친구가 집에서 토마토를 가져와서 너에게 먹고 싶으면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네 기분이 어떨까?”
“저는 토마토 안 좋아해요.”
‘오 마이 갓.’
월요일 아침 출근 시간에 교무실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홍준이 어머니 전화였다.
“선생님 주말이라 실례될까 봐 전화를 못 드리고 이제야 전화드려요.”
“홍준이 어머니 무슨 일 있나요?”
‘무릎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말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반 친구 어머니한테 들었다고 했다. 홍준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친구들에게 사과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셨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와 보니 친구들 책상마다 한 개씩 놓여 있는 빨갛고 큼지막한 자두가 보인다. 친구들과 홍준이 얼굴에 즐거움이 묻어난다. 홍준이가 자두를 들고 온 것이다. 내 책상 위에는 두 개다. 톡, 톡 상큼한 자두 즙이 여기저기 터지는 맛있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