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오찬 Jul 04. 2021

피란민이 만들어낸 부산의 맛, 밀면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내호냉면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 문명이 전파되었고, 이질적인 문명이 통섭(統攝)되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졌으며, 그리하여 발전하고 있다. 전쟁은 지배하고자 하는 정복욕에서 비롯되었으나 난리로부터 생명을 지키려는 이동행위, 피란 역시 만들어냈다. 그래서 피란민이 만들어낸 음식은 "불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자 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작은 풀꽃 같은 소박함"을 안고 있다.


당시 밀면 가게를 재현한 모습 (출처 :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거창하게 꺼낸 서두이지만, 부산의 소박한 향토음식 <밀면>에 관한 이야기이다.


1950년 6월, 북한군은 기습 남침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였고, 부산은 임시 수도이자 피란길의 종착지가 되었다. 흥남부두 철수와 1.4 후퇴로 60만 명의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들며 인구는 급증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섞여 살며 <부산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


밀면의 시작은 <함흥냉면>과 <삯국수>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흥남 철수작전 사진 자료 /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기념비

부산의 밀면은 빨간 양념장이 올라간 것이 묘하게 함흥냉면과 닿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함흥·흥남 지역 10만여 명의 피란민이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도착한 곳이 거제 장승포였으니 함경도 사람들이 먹던 농마국수와 이들이 부산에서 정착하여 만들어낸 밀면은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다.

내호냉면 메뉴판 (함흥 회국수의 흔적인 양념가오리회가 아직 남아있다)

실제 이 식당의 메뉴판을 보면 다른 밀면집에서는 만나기 힘든 메뉴인 <양념가오리회>가 있는데, 이는 감자전분으로 만든 면에 양념 가오리회를 얹어먹던 함흥지역 <회국수>의 흔적이다.


 물론 평안도 지방에서 내려온 이들도 부산에 자리 잡았지만, 평양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은 전란 이후 밀가루 가격 대비 다섯 배 이상 비쌌던 데다 부산에선 경작하지 않았던 작물이다 보니 자연스레 평양 음식은 부산에서 명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떠한 음식이 대표성을 가진다는 것은 "해당 지역에서 손쉽게 재료를 구하기 쉬웠다."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당시 60만 명의 피란민이 거주하고 있던 부산에 미국의 무상 원조 물품인 <밀가루>가 집중 배급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밀가루가 흔하니 밀면이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피란민들이 내려와 만들어먹던 고향의 농마국수는 주로 감자전분을 사용하는데, 경상권은 기후 문제로 감자보다는 고구마를 경작하던 지역이니 말린 고구마를 곱게 빻은 가루로 면을 뽑아 만든 음식이 지금 우리가 먹는 함흥냉면이다.

내호냉면에 삯국수 의뢰를 맡긴 동항성당의 故 하 안토니오 신부님

당시 이북 지역에서는 집에서 감자 전분을 가져가면 식당에서 품삯만 받고 국수를 만들어주는 <삯국수>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는데,  우암동 내호냉면에서 동항성당 하 안토니오 신부님의 의뢰를 받아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7:3의 비율로 섞어 만들어낸 것이 밀면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빈자의 성자라고 불리셨던 하 안토니오 신부님의 동항성당 주임신부 부임시기가 1959년이니 내호냉면에서 최초로 밀면을 만들었던 시기 역시 이 즈음으로 추정된다.

식객에도 소개된 밀면 원조 식당, 내호냉면

부산에선 김밥천국에서도 파는 것이 밀면이라지만, 이왕 경험하려면 밀면 원조 식당인 <내호냉면> 추천한다. 내호냉면이 부산에서 개업한 시기는 1953년이나 실상  냉면집의 역사는 1919 이북에서 개업한 동춘면옥으로부터 셈해야 한다. 동춘면옥의 주인장이었던 이영순 여사가 전쟁통에 피란을 와서 같은 상호로 식당을 열었다가 우암동에서 장사를 시작한  10  정도 되던  "고향인 흥남면 내호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내호냉면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곳은 <4 백년식당>이라 봐야 한다. 또한 밀면 원조 식당임에도 상호는 오히려 내호밀면이 아닌 내호냉면인 것은 식당의 뿌리가 냉면집이었던 동춘면옥이고,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냉면을 팔던 곳이어서라는 것도 기억해둬야할 이야기이다.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 7:3 원조 배합비율의 밀면

사실 이 집을 경험하기 전 다른 식당의 高함량 밀가루면을 먹을 때만 해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한국 근대사에 얽힌 시대의 아픔을 알고 내호냉면의 밀면을 먹으니 모든 것이 의미 깊게 다가왔다. 밀가루면에 고구마 전분가루가 들어가니 냉면이나 다른 식당의 밀면보다 면이 좀더 두터웠고, 소의 사골과 사태, 양지로 우려낸 육수는 깔끔하며 개운했다.





이전 03화 오장동 함흥냉면의 전설 가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