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삼척시 정하동 바다횟집
강원도 최남단 도시인 삼척은 동쪽으로는 동해안 해안선, 서쪽은 정선과 태백, 남쪽은 경북 울진, 북쪽은 동해시와 접하고 있어 동해안의 관문으로 불리는 곳이다. 다만 과거 삼척을 방문하려면 영동고속도로의 끝자락에서 다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남하해야 했던 데다 관광 인프라가 미처 개발되지 않아 한동안 동해안의 관문 대신 오지(奧地)로 불렸었더랬다. 그러나 삼척이라는 지역이 품은 역사가 유구하고, 한국의 나폴리라 불릴 만큼 깨끗하고 맑은 바다와 5억 3천만 년 전 생성된 환선굴과 대금굴이라는 천혜의 자원을 갖추고 있는 데다 삼척에서 차량으로 15분 거리 동해까지 서울에서 KTX로 연결되어 있으니 강원도의 관광도시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삼척은 본디 약 2천여 년 전 실직국이라는 군장국가가 자리했던 지역으로 이곳은 505년 신라 지증왕 때 합병되어 실직주로 변경되고 757년 경덕왕 때 비로소 지금의 지명을 갖게 된다. 삼척(三陟)의 지명은 세 개의 하천을 끼고 있는 골짜기라는 뜻의 '실직'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세 개의 하천은 곧 북평의 전천, 삼척 시내를 통과하는 오십천, 근덕의 마읍천을 가리킨다.
신라 지증왕 당시 아슬라주(지금의 강릉)를 맡아 다스리고 있던 이사부 장군은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복속시키는데, 당시 우산국 사람들은 바다를 터전으로 하고 있어 성정이 용맹한 데다 지세(地勢)까지 거칠어 무력으로는 쉽게 정복할 수 없기에 계책을 낸 것이 바로 나무로 만든 사자를 전선(戰船)에 가득 싣고 위협을 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가 서기 512년 6월이었다고 전해지는데, 6월은 동해가 1년 중 가장 잔잔하며 난류와 한류가 만나 울릉도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시기인지라 이를 고려하여 이사부 장군이 출항한 곳이 바로 군선 출입이 용이한 삼척이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이사부의 우산국 복속에 대한 역사적 권원은 고려 · 조선으로 이어졌고 1900년 대한제국 칙령으로 법제화되었으니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근거의 첫 번째 단추가 바로 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공원과 더불어 역사 속 인물을 토대로 한 공원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로부인 헌화공원>이다. 때는 신라 성덕왕 시절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남편, 순정公을 따라가던 중 사람이 닿을 수 없는 천길 절벽 위에 핀 꽃을 갖고 싶어 하자 마침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꺾어다 바치며 부른 노래가 바로 <헌화가>이다. 수로부인이 얼마나 경국지색이었던지 다시 채비를 차려 길을 나선 중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닷속에 끌고 갔는데, 백성들을 시켜 "거북아 거북아 수로(水路)를 내놓아라, 그렇지 아니하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란 노래를 부르며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치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고 한다. 이때 부른 노래가 바로 <해가사>이다.
또한 삼척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태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어 원주로 추방당했다가 삼척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일파에 의해 교살되어 묻히니 이곳이 바로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공양왕이 살해된 곳이 싸리재(살해재)이고 이곳에 한 달 넘게 핏물이 흘렀다 한다. 궁촌은 임금이 계신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성계가 삼척 땅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을 살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이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이안사)의 부친인 이양무 장군이 묻힌 땅이기도 하다. 조선 왕실의 가장 오래된 선대 묘이며 그 터는 5대 뒤 왕이 될 자손이 태어날 명당으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목조인 이안사가 아버지의 묘를 쓸 땅을 찾아 삼척의 지기 좋은 곳을 찾아다닐 때 어느 도승이 혼잣말로 "백 마리의 소를 바치고, 금으로 만든 관을 안장하면 5대 뒤 왕이 나올 자리"라 하는 이야기를 듣고 꾀를 내어 한자와 음이 같은 백우(白牛 : 흰소)를 바치고, 황금빛을 띠는 보리로 관을 짜서 아버지를 모시니 후손인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토록 삼척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품고 있는 신화와 전설, 민담이 가득한 곳이다.
삼척은 바다와 산을 모두 끼고 있어 어업과 농·임업이 공존하는 작은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주로 어류와 산나물로 만든 음식이 눈에 많이 띄는데 대부분은 강원도 다른 도시의 음식과 눈에 띄는 차별성은 발견하기 힘들다. 다만 삼척에는 이것만큼은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할만한 향토 음식이 있으니 바로 다른 지역에서는 맛보기 힘든 <곰치국>이다.
곰치는 뭉툭한 큰 입에 머리와 같은 크기로 두툼하게 뻗은 몸통, 미끄덩거리는 껍질, 흐물흐물한 살결을 보면 도무지 음식으로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모양새이다. 실제 <미거지>라는 정식 이름이 있지만, 워낙 못 생겨 이 지역에서는 <곰치>라 부른다. 곰치의 날카로운 이빨은 주둥이에 닿는 것들을 낚아채어 끓어버리니 어부 입장에서는 값어치는 없고, 그물을 망가뜨리는 곰치가 그다지 반가운 생선은 아니었을게다. 삼십여 년 전만 해도 나룻가에는 버려진 곰치가 수두룩했고, 곰치가 많이 잡히는 겨울철이면 아낙네들은 곰치를 팔기 위해 이 집 저 집을 전전해야 했다고 한다. 버리기 아까워 할 수 없이 먹던 음식이 바로 곰치였는데 삼척이 관광지로 각광받으며 수요가 늘자 이제는 한 그릇에 15천 원이나 하는 '금치'가 되어버렸다.
고성과 양양 지역에서는 곰치를 맑은 국으로 먹기도 하지만, 삼척에서는 별다른 양념 없이 곰삭은 강원도 김치를 넣고 끓여낸다. 삼척에서 곰치국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식당이 바로 <바다횟집>이다. 가정에서 만들어 먹던 곰치국을 상업적으로 판매한 원조 식당은 중앙시장 인근에 자리한 금성식당이라 알려져 있는데, 각종 방송매체를 통해 삼척의 곰치국을 전국에 널리 알린 곳은 바다횟집이다.
동해의 밥상은 서해와 달리 간소하면서도 직관적인데, 이 식당에서도 역시 말린 오징어 조림과 열무김치, 미역줄기무침 등 소박한 가정식 반찬에 곰치국이 한 대접 나온다. 곰치는 흐물거리는 살 때문에 젓가락 대신 수저로 떠먹어야 하는 생선인데 칼칼한 국물과 함께 생선살을 후루룩 먹으면 전날 먹은 술이 단박에 달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