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공채 교육을 받다가 TO가 하나뿐인 직무로 무려 10명이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본사에서는 6개월만에 빈 그 자리에 경력직을 채용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전문성을 쌓기 위해 과감히 퇴사를 결심했고, 팀장님께 퇴직 면담을 요청했다.
최근 조직 내 퇴사율이 솟구쳐 위기감을 느끼셨던 것일까? 사실 내가 인사팀에서 지정한 너의 멘토였다는 때늦은 고백과 함께 팀장님은 퇴직 면담 시간을 멘토와 멘티의 첫 식사 자리로 보기좋게 포장했다. (저기..팀장님. 멘토링은 입사 초기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 아니었나요..?)
팀장님은 나의 퇴사 결정 이유에는 1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으레 사회 초년생의 던지는 치기 어린 투정쯤으로 나의 퇴사 고백을 단정해 버린 듯했다.
“회사생활이 다 거기서 거기지.
다른 회사 가도 별반 다를 거 없어.
내가 이미 수없이 겪어봤잖아.
형이 너 생각해서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둘만의 식사 자리에서 팀장님은 세상에서 나를 제일 걱정해주는 우리 형이 되어 있었다. 우리 형은 면담 내내 본인이 정해놓은 퇴사 번복이라는 골문을 향해 나를 일방적으로 몰아세웠다. 퇴사하지 않겠다는 대답 외에는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압박감 때문인지 평소보다 공기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한참이 지나도 나의 퇴사 의지가 꺾이지 않자 식사 자리는 순식간에 얼음장이 됐다. 한순간에 나는 말이 전혀 안 통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되어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팀장님은 이미 빨간불이 켜진 내 마음속 신호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길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참 고집 세다. 그렇게 안 봤는데 외골수네!
최근 2년간 퇴사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그분의 최종 목표는 오로지 나를 눌러 앉히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선한 의도로 포장됐던 멘토님과의 첫 1:1 식사 자리는 퇴사 결정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를 위한 좋은 마음으로 포장된 일방적 강요는 불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때론 가슴이 새카맣게 타버렸고, 때론 그 화살이 내 마음에 성난 불을 지펴 ‘반대할수록 보란 듯이 더 성공하고 말겠어.'라는 청개구리 심보를 키워줬다.
선한 의도가 낳은 ‘도덕적 우월감’은 스스로 부여한 일종의 면죄부였다. 그 면죄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바로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야”다. 그는 자신이 던지는 말과 표현이 선을 넘는 참견임을 모른 채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목적지가 하나뿐인 대화는 그만큼 갈등에 취약하다. 상대방에게는 그들의 강요를 수락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경로를 이탈했을 때 그들은 곧장 채찍을 휘두른다.
적어도 나의 경험 안에서 선한 의도로 시작된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한 의도 어딘가 일그러진 구석이 있었다. 혹은 진짜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잘못된 표현 방식으로 관계가 눈 깜짝할 새에 멀어지는 상황을 수없이 목격했다.
심리학자이자 상담치료 기법을 연구한 칼 로저스의 '인본주의 상담' 철학은 전 세계의 수많은 심리 상담가들과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상담을 통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내담자의 태도보다 치료자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칼 로저스의 인본주의 상담 철학>
인간은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스스로의 내면적 동기와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며, 치료자가 내담자를 받아들여 공감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면 내담자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그의 사상은 훗날 코칭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코칭의 가장 중요한 철학 중 하나는 '상대방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질문한다.'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정해진 길로 이끄는 '컨설팅'과는 전혀 다른 방법론인 것이다.
일상에서 상대방이 직접적인 '컨설팅'을 먼저 요청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상대방이 답을 스스로 찾도록 기다려야 한다. 요즘 들어 얼굴이 어둡고, 학교가기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맨날 핸드폰만 붙잡고, PC방에서 사니까 그렇지!"라는 일방적인 결론과 불만을 전하기보다 "요즘 학교를 가고 싶지 않아?"와 같은 질문으로 공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이들의 대화는 마주하며 말한다는 '대화'의 본래 의미가 무색하다. 그들의 대화는 걱정으로 포장된 방향 지시에 가깝다.
국제적 평화단체인 비폭력대화센터의 설립자인 마셜 로젠버그는 '비폭력대화'라는 해답을 제시한다.
비폭력대화란?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비폭력대화를 이해하며 평소 내가 선한 의도를 갖고 상대방에게 던지는 말들 속에도 상대방에 대한 평가와 강요 그리고 저항감까지 줄 수 있는 폭력성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폭력대화에서는 특정한 결과를 얻는 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각자의 욕구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하여 모두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춘다.
비폭력 대화는 관찰, 느낌, 욕구, 부탁의 4가지 단계로 나뉜다. 우리 모두가 4가지 핵심 단계만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속 청개구리를 곤히 잠들게 하면서도 우리 모두를 위한 행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1. 평가가 아닌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관찰에 평가를 섞으면 듣는 사람은 그것을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말에 저항감을 느끼기 쉽다.
평가 : "그 사람은 약속 시간을 안 지키고 상대방을 무시한다."
관찰 : "그 사람은 지난 두 번의 약속에 40분씩 늦게 왔다."
평가가 주관적인 반면 관찰은 객관적이다. ‘Fact’로만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관찰이다. 약속에 늦을만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하나의 사건으로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2. 생각이 아닌 느낌 표현하기
느낌을 표현하는 말과 생각, 평가, 해석을 나타내는 말을 구별해야 한다.
"네가 갑작스레 휴학을 하는 것은 취업을 도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표현은 실제 느낌이라기보다 내가 상대방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말이다. 본인의 느낌을 정확히 표현한다면 "네가 갑작스레 휴학 결정을 하는 것이 성급한 결정이 될까봐 걱정된다."가 되어야 한다.
3. 느낌의 근원인 욕구 찾기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욕구를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다.
"신입사원으로 고작 6개월 정도 일한 네가 1년도 못 채우고 퇴사한다고 하니 너무 실망스럽다."라고 말했던 팀장님의 말에는 나에 대한 비판 그리고 퇴사를 막으려는 욕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너와 오래도록 함께하길 바랐기 때문에 너의 퇴사 소식이 조금 서운하다. 내가 도와줄 것이 없을까?"
팀장님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분의 진한 아쉬움과 인간적으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4. 강요하지 말고, 부탁하기
상대방이 우리의 부탁에 응하지 않을 때 비난이나 처벌을 받게 되리라 생각한다면 이는 부탁이 아닌 강요가 된다. 하지 않을 것을 부탁하기보다 하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는 긍정적인 행동 언어를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부탁이라고 한다. 동시에 변화를 직접 유도할 수 있도록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을 피한다.
"네가 퇴사하지 않기를 우리 모두가 기대한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난과 처벌이 따라올 수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부정적인 부탁이다.
"네가 퇴사를 한다면 너의 어떤 욕구가 충족되는지 내게 말해주면 좋겠다. 너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함께 의논하고 싶다."라고 했다면 나는 팀장님을 믿고 퇴사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해봤을 것이다.
1. ‘도덕적 우월감’은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가 아니다. 상대방이 내 맘 같지 않고, 자꾸 엇나간다는 생각이 들 때 혹시 내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선 넘는 강요를 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자.
2. 우리는 컨설턴트가 아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상대방에게 있다. 공감하고, 질문하고, 기다리자.
3. 비폭력대화의 관찰, 느낌, 욕구, 부탁의 4단계 프로세스로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건강한 대화를 하자.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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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 비폭력대화_마셜B.로젠버그 지음/캐서린 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