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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도개 Oct 20. 2023

햇빛 한줄기

나는 생각보다 잘나지 않았다

우리 일족은 예로부터 땅속 깊은 곳에서 빛을 피해 살아왔다. 밤이 되면 밖으로 나가 큰 인간들을 피해 그들이 일궈둔 감자나 고구마를 헤집어내 잔뜩 둘러메고 어린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귀가한다. 눈에 잠이 가득한 아들은 헤실헤실 내가 가져온 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며 아빠가 최고!라고 말하곤 했다. 큰 인간들은 우리 때문에 약이 올라 죽을라 했지만 베테랑인 나는 절대 잡히지도 그만두지도 않았다. 그 당시 나는 1등급 두더지기 때문에 호락호락하게 삽에 처맞고 삶을 마감하는 일 따윈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인간과 흡사하지만 크기는 겨우 엄지만한 예쁘장한 소녀가 우리 일족의 구역에 나타났다. 그녀는 두꺼비에게 납치당해 난감한 상황이라며 도움을 청하였다. 나는 첫눈에 그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고 일단 우리 집에 머무르며 부르튼 발과 지친 마음을 안정시키라 허락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엄지공주로 우리 아들을 살뜰히 챙기며 고구마를 맛깔스럽게 구워내는 참한 여성이었다. 나는 점차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프러포즈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도 나를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기에 나는 어느 날 밤 밖에서 향기로운 장미를 잔뜩 따 가지고 돌아갔다. 나의 고백에 그녀는 조금 고민하더니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나도 두더지씨가 싫은 건 아니지만 우리 관습에서는 결혼하려면 부모님을 뵙고 허락을 받아야 해요. 이 굴 속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아니 무엇이 어려울까. 나는 당장 내일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가 그녀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들내미의 억센 머리를 예쁘게 빗기고 하나 있는 나비넥타이를 챙겨멘채 그녀와 땅 위로 향했다. 처음 낮에 향하는 바깥이었다. 마침내 맨땅에 도착하고 햇빛 한줄기가 쏟아졌다. 처음 느껴보는 강력한 빛이었다. 나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한 빛이었다.

"엄마, 지금이야"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와 동시에 아들의 짧은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항상 큰 인간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는 두더지를 보며 멍청하다며 비웃곤 했다. 하지만 큰 인간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교활하고 똑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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