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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Sep 14. 2023

아빠가 사라졌다 (8)


이 글은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전날 동창회는 4시에 미주중학교 소강당에서 시작했다. 규민과 진순은 동창회가 시작되고 20분 정도가 지나서 학교에 도착했다. 교문을 지나 건물 옆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소강당으로 향했다. 주말 오후의 학교는 고요했다. 규민은 미주에 올 때면 아주 가끔 미주중학교를 구경오기도 했었다. 대략 4-5년 주기로 방문하는 학교는 매번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바뀌었다. 보도블록이 깔리고, 건물의 페인트 색이 바뀌고, 화단이 생기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운동장이 정비되기도 했다. 동시에 그가 기억하고 있던 학교의 본래 모습은 조금씩 바래져 갔다. 40년 전 그들이 3학년을 시작할 때 완성된 신축 본관은 이제는 거의 반세기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낡은 건물이 되어 있었다. 본관 앞을 지나 교문 반대편에 있는 체육관 건물로 들어섰다. 현관 유리문을 지나면 한쪽 편에 2층 체육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남녀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으로 두터운 방음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누군가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작은 웅성거림과 함께 섞여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방음문 옆에 서 있는 세로현수막에는 ‘제73회 미주중동문회’라고 볼품없이 크고 굵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현수막 옆 테이블에는 방명록과 수성사인펜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방명록은 펼쳐져 있었고 왼쪽 제일 위 장에는 앞면에 쓰인 몇몇 이름들이 흐릿하게 거꾸로 비쳤다. 규민과 진순은 방명록 오른쪽 장에 자신의 이름을 차례로 적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후회하고 있었다. 동창회에 괜히 온 건 아닌가. 하지만 어느 누구도 돌아가자 하지 않았다. 방음문을 조용히 열자 마이크 소리 볼륨이 갑자기 커지고 뚜렷이 들렸다.


“재학생들의 독서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기부금의 일부를 도서관 리모델링비로 지원하였습니다. 기부해 주신 동창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눠드린 동창회비 결산자료 4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강당에는 다리가 바닥에 고정된 좌석이 제일 뒷열에서부터 완만하게 두 줄씩 낮아지고 있었다. 대략 1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좌석은 3분의 1 정도 채워져 있었다. 제일 앞 무대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발표 자료가 무대 벽 쪽 전체를 뒤덮은 하얀 스트린에 투사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결산 자료로 보이는 표와 숫자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무대 왼쪽 끝 단상 위에 마이크를 잡고 있는 사람은 황준목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규민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황준목의 목소리는 40여 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분명 그때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의 음색, 높이, 리듬, 독특한 발성이라던가 속도 같은 것을 규민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윽박지르고 욕하고 괴롭히던 큰 목소리를 똑똑히. 어쩌면 무대 위 황준목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거라 스스로를 속인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규민은 굳어 있는 미간과 입술 양끝, 턱을 인식했다. 짧은 시간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꽤나 강하게 힘을 주어 미간을 찌푸리고 어금니를 악물고 있어서인지 살짝 경련이 올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굳어 있었을까. 당장이라도 황준목의 싸대기를 시원하게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뭐. 독서교육이라.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좌석 제일 뒷 줄에 앉았다. 그 후로도 약 10분 정도 예산지출보고가 이어졌다. 보고가 끝나고 교복을 입은 재학생 몇 명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을 가지고 나와 제목을 알 수 없는 실내악곡을 두 곡 연주했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도 어설픈 곡이었다. 전반적으로 서먹하고 볼품없는 동창회였다. 박수소리는 힘이 없었고 여기저기 속닥거리는 소리가 산만하게 들렸다. 연주가 끝나고 황준목이 다시 단상으로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멋진 연주를 한 후배님들에게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짐짓 과장된 억양으로 어색함을 타개해 볼 요량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다.


“자, 모두들 즐거우셨나요? 이제 1부 행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학교 근처 ‘용화장’이란 중식당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2부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약도는 저기 소강당 문에 크게 붙여 두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은 넉넉잡아… 6시까지 식당으로 오시면 됩니다. 천천히 이동하면서 오랜만에 보는 동창 분들과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듬성듬성 뒤통수들이 일어났다. 큰 웃음소리와 작은 웃음소리가 몇 차례 들렸다. 악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 서먹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규민과 진순은 아직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른 학교 동창회에 잘못 온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낯선 얼굴 투성이었다. 황준목이 없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갔을 만큼. 그 황준목은 앞쪽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악수하고 과장되게 웃고 있었다. 지금 저기 있는 저 동창 선후배들은 그의 실체를 알고 있을까? 40년의 세월은 사람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규민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진순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어? 명규민? 한진순? 이야. 반갑다.”


황준목이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는 큰 소리로 그 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규민은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통로로 나왔다. 진순도 따라 일어났다. 황준목은 중앙 통로로 성큼성큼 걸어와 규민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 그래. 오랜만이야. 어떻게 바로 알아보네?”


규민은 황준목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중학생 때 올려다보던 황준목의 얼굴은 지금은 규민의 눈높이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짙은 쌍꺼풀이 있는 부리부리한 눈은 검은 피부와 어울리는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두툼한 턱살과 와이셔츠 아래 뱃살은 동생과 형 같았고 그래서 당연히도 그는 넥타이를 하지 않았고 재킷 단추를 채우지 않았다. 40년이나 지났지만 그를 가까이 마주하자 규민은 다시금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친하게 지냈는데 당연하지.”


친하게 지냈다니. 정말 잊은 건지 잊은 척 연기하는 건지.


“친하게 지내?”


규민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고는 황준목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냉소와 순수한 호기심의 중간 정도 억양. 그의 냉소를 눈치채길 은근히 바라는 소심한 도발이었다. 황준목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고 진순이 서둘러 악수를 청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잘 지냈냐? 어떻게 동창회 사무총장 같은 걸 하게 됐냐?”


황준목은 규민의 손을 놓고 진순과 악수를 나눴다.


“아. 아버지 자리 물려받아야지. 우리 학교 동문 라인이 미주시 메인아이가. 얼굴 도장 찍을 데가 많아.”


규민은 황준목의 아버지가 시의원을 했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힘깨나 쓰는 지역 정치가의 새끼는 다들 왜 그 모양일까. 뉴스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클리셰. 보통 이런 새끼들은 어릴 때부터 힘과 굴복의 상관관계를 체득할 정도의 예민함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후광의 힘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휘두르는 미숙함도 있었다. 결국 깨진 거울의 어긋난 선 같은 인격을 갖게 된다. 40년 전 그때도, 지금도 현실은 그 클리셰를 답습했다.


“근데 신기한 게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오던 동창회 초대장을 올해 받았어. 우리도 신기해서 온 거라니까. 넌 동창회 자주 참석했었나 봐?”


진순이 황준목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거 몇 년 치 졸업앨범 뒤에 있는 동창들 주소로 싹 다 보낸 거다. 이번에 판을 한번 크게 키워볼라고. 근데 보면 알겠지만 거의 안 왔네. 다들 쌩깠지 뭐. 개놈의 새끼들.”


황준목이 욕을 뱉을 때 두터운 목살이 가볍게 출렁거렸다. 규민은 그 모습을 보며 40년의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 아닐까 속으로 물었다. 동창회 규모를 키우기 위해 30, 40년 전 주소로 초대장을 보내는 따위의 일을 한다는 어리석음이나. 굳이 주말에 학생을 학교로 불러 조잡한 실내악 같은 무대를 준비한 비루함이나. 그런데도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오지 않은 이를 탓하는 좁은 시야나. 애초에 동창회를 크게 열겠다는 겉만 번지르르한 허영 만이 황준목의 말에는 담겨 있었다.


“그래도 너희들 얼굴 보니 좋네. 식당 어딘지 알제? 밥 먹고 가라. 난 회장님 모시고 가야 된다이."


황준목은 씩 웃고는 몸을 돌려 다시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진짜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기억 못 하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만약 본인이 황준목처럼 학창 시절에 그렇게 괴롭힌 누군가를 만난다면 태연하게 마주하지 못했으리라. 80개가 넘는 얼굴 근육 중 적어도 하나는 경련이 올 텐데. 규민은 황준목의 태연함에 분노했다기 보단 오히려 감탄했다.


“아, 저 새끼 전혀 당황하지를 않네. 기억력이 나쁜 건지 연기를 하는 건지.”


진순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휴우. 식당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차는?”

“술이 당긴다. 차 두고 가자. 찜질방에서 한숨 자고 내일 오전에 가던지 하면 되지 않을까?”

“… 그래. 나도 저 면상 보니까 짜증 나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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