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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Sep 11. 2023

아빠가 사라졌다 (7)


이 글은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현관을 나서기 전 집을 한번 둘러보았다. 1층인 데다 베란다에 블라인드까지 쳐져 있어 거실과 현관 앞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오직 아빠 방의 조금 열린 문으로만 옅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수년간 신발을 신고 벗었던 현관도 낯설게 느껴졌다. 불현듯 이 문을 나서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되돌아보면 28년간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큰 사건을 겪은 적은 없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나 임용 시험에 떨어져서 재수를 해야 했던 때 같은 슬픈 기억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무너짐이라던가,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된 가장의 참담함 같은, 내 인생은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정도의 충격적인 경험은 없었다. 물론, 아빠의 연락이 끊긴 지는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연락이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길 바라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이 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생각은 갑자기 떠오른다. 때때로 무언가를 ‘생각해 내기’ 위해,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보통 생각이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직전에 하던, 그리고 이후에 하게 될 생각과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다. 고요한 수면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 죽은 물고기 한 마리 같은. 그저 맥락 없이 떠오를 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떠오르는 그 생각이 동반하는 감정과 충격의 파문을 감당하는 것이다. 어떤 때에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직 해결하지 못한 감정만이 남게 되어 이유도 모르는 공허함에 고통스럽기도 한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녀는 그 생각과 감정을 현관에 남겨두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서울역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그녀는 진순 아저씨의 전화를 받았다. 전철 내 에어컨이 세게 작동하고 있어서인지, 아빠에 대해 너무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혹은 아까 밥을 먹으며 읽은 장합석의 비상식적인 사건 때문이었는지. 영화 속 슬로 모션 장면처럼 그녀 뇌 속 시냅스의 전기신호가 느릿하게 깜박거리는 듯했다. 그래서 진순 아저씨와의 대화 내용을 처리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겨우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통화를 마쳤다. 아저씨는 어제저녁까지 아빠랑 함께 있다가 혼자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 아저씨의 목소리는 잠이 덜 깼는지 느리고 부정확한 발음이었다. 마치 그녀의 지금 정신상태처럼. 그래서 더 집중하기가 힘들었나 보다. 아빠가 아직 연락이 안 된다고 그녀는 말했고 진순 아저씨는 아빠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럴 거라고 추측했다. 어제 헤어질 때도 많이 취해 있었다고. 본인도 어제 미주에서 술을 꽤 마시고 올라와 지금까지 자다 일어났고 그래서 그녀의 문자를 늦게 보았다고 했다. 어제 동창회에서 아빠의 심정을 좀 들었다고. 그녀에게 하나 전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고 했다. 그녀는 미주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고 아저씨는 댁이 신도림이니 서울역까지 얼마 안 걸린다고 하였다. 역사에 먼저 도착하면 연락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치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에 그녀는 기차 시간을 조금 늦출 필요가 있겠다 생각했다. 어제저녁 마지막까지 아빠와 함께 있었던 진순 아저씨와 연락이 닿았으니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1시 30분 기차가 있어 다시 예매를 하고 원래 기차표를 취소하였다. 큰아빠에게는 3시쯤 도착하는 기차로 바뀌었다고 문자로 알려주었다. 엄마에게도 서울역에서 미주로 가기 전에 진순 아저씨를 만난다고 알렸다. 예매와 연락을 끝낸 그녀는 반대편 창문의 검은 배경 속 자신의 상체 윤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비친 그녀 모습의 잔 일렁임과 전철의 흔들림과 ‘쿠다다당, 쿠다다당’ 거리는 일정한 박의 소리만이 전철의 빠른 속도를 가늠하게 해 주었다.


서울역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높은 천장은 시원하게 뚫린 하늘 같았고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넓은 공간에서 사방으로 튕겨 반사되는 소음은 서로 뒤섞여 이명처럼 입체적으로 들렸다. 소리는 감촉으로 변했고 마치 바닷속에서 몸 전체가 물로 둘러싸인 것처럼 편안한 소음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년 두세 번 서울역에 기차를 타러 왔었다. 그녀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아빠가 운전하는 차로 미주에 갔었다. 아기와 함께 움직일 때는 챙겨야 하는 짐도 많았다. 하지만 아빠는 운전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가 초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는 거의 항상 기차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갔다. 세 사람의 짐도 캐리어 하나 정도로 해결이 되었다. 때로 엄마는 이 점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기차 여행이 좋았다. 붐비는 역에서 사람들의 파도를 헤치고 나아갈 수 있었다. 여행하는 중에 엄마, 아빠와 눈을 마주 보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고 함께 간식을 나눠 먹을 수도 있었다. 가족 외에도 행선지는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어 설렜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이 칸, 저 칸, 식당칸, 화장실 등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탐험할 수 있었다. 특히 창 밖 풍경이 멋졌다. 어떨 땐 먼 산과 하늘과 구름이 느긋하게 지나가고. 어떨 땐 큰 건물과 작은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눈앞에서 슝슝 사라지고. 길게 늘어선 전깃줄이 기차와 함께 달리기도 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자동차를 따라잡기도 하고. 가끔은 반대 방향 기차가 정면에서 ‘콰과과광’ 큰소리를 내며 부딪칠 듯이 스쳐 지나가 등골이 서늘하기도 했다. 캄캄한 밤 창문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에 겹쳐 아리송한 먼 가로등이나 인가의 불빛을 쫓는 것도 즐거웠다.


그녀가 약국과 화장실, 에스컬레이터가 함께 있는 통로를 지나고 패스트푸드점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혹시 명하림 맞니?”


역은 아득하게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크지 않은 목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순 아저씨였다.


“아,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진순 아저씨 가족과는 아빠, 엄마와 함께 1년 혹은 2년에 한 번 정도 만났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진순 아저씨와 아주머니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대신 그 부부는 작은 강아지 두 마리를 키웠다. 두 가족은 가끔 식사를 하기도 캠핑을 가기도 했고 그녀는 강아지들과 노는 게 즐거웠었다.


“키도 많이 크고 못 알아볼 뻔했어. 내가 잘 찍었네.”


진순 아저씨가 말했다. 아저씨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봤던 그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중키에 짧은 곱슬머리, 선이 굵은 인상과 후덕한 몸집.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밝은 톤의 반팔 남방과 반바지로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다만 숙취 때문이었는지 다소 기운 없는 표정이었다.


“아, 서울역까지 오시고, 정말 감사드려요. 아주머니랑 두 분 다 잘 계시죠?”

“잘 있지. 그나저나 기차 시간 괜찮니? 괜찮으면 아저씨가 커피 한 잔 사줄게.”

“아, 네. 여유 있어요. 감사합니다.”


둘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위층 에스컬레이터 끝에는 문과 한쪽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유리 벽의 이곳저곳에는 카페 상호 명이 독특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카페 문을 제외한 유리벽 앞으로 일렬로 늘어선 다양한 모양의 화분에는 분홍, 주황 등으로 칠한 인조식물이 어깨까지 높이 어지럽게 꾸며져 있었다. 식물 사이사이로 카페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다행히 두 사람이 앉을 만한 테이블은 군데군데 있었다. 진순 아저씨가 먼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의 큰 공간 속에서 뒤섞여 울리는 입체적인 소음과는 다른 종류의 소음이 흘러나왔다. 좀 더 1차원적이고, 그래서 개별성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의 말소리, 커피머신의 작동 소리, 달그락 거리는 소리. 그녀는 진순 아저씨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짙은 갈색의 나무로 된 2인용 둥근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각자의 의자에 가방을 놓고 두 사람은 카운터로 갔다.


“뭐 마실 거니?”

“감사합니다, 아저씨. 저 아이스아메리카노 마실게요.”


카운터에는 두 여자가 주문을 하려고 줄 서 있었다.


“자리에 가 있으면 내가 주문하고 갈게.”


진순 아저씨는 두 번째 사람 뒤에 서며 말했다.


“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켰다. 큰아빠로부터 [알겠다]는 답장이 와 있었다. 그 외에는 즐겨보는 웹툰의 최신화가 떴다는 알림. 누군가를 찾는 안전안내문자. 몇몇 앱에서 보내온 광고 알림이 떠 있을 뿐, 아빠에게서 온 문자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자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심각하게, 즐겁게, 무관심하게 이야기하거나 폰을 보거나 다른 일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하고 있었다. 진순 아저씨는 주문벨을 들고 자리로 왔다.


“그래. 한 십 년 만인가? 중학생 때 보고 처음인 거 같은데? 아버지한테 교사 됐다는 얘기 들었어.”

“아, 네. 아빠 근처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그래. 아버지는 아직도 연락 안 왔니? 나도 아까 문자 보내 봤는데 답장이 없더라고.”

“아직 없으세요. 그나저나 제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으시다고…”

“아. 잠깐만.”


진순 아저씨는 자신의 의자 옆에 둔 가방을 들고 지퍼를 열어 그렇게 두껍지 않은 종이 묶음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어제 동창회에서 술을 많이 마셨어. 너도 알겠지만 지금까지 아버지나 나나 동창회 초대장은 받아본 적도 없고 나간 적도 없었어. 근데 처음으로 초대장을 받은 거지. 하필 발송한 동문회 사람이 학교 다닐 때 반에서 꽤 질 나쁜 놈들 중 하나였어. 너희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 녀석들한테 더러운 추억이 좀 있었거든.”


그녀는 진순 아저씨가 준 종이 묶음을 받았다. 정식 출판된 책은 아니었다. 표지 중앙에는 ‘19XX년 미주중 3학년 4반 졸업문집’이라고 누군가 두꺼운 펜으로 직접 쓴 제목이 있었다. 정식 출판본이 아니라 학생들이 모은 글들을 누군가 서툴게 제본한 것 같았다. 표지 네 모서리가 다들 조금씩 구겨져 있었고 표면 여기저기에는 옅고 투명한 누런 얼룩이 묻어 있었다. 대략 종이 50장 정도의 두께였다. 왼쪽 면은 검은 제본끈으로 삐뚤삐뚤하게 묶여 있었다.


그나저나 동창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라. 큰아빠가 엄마에게 보내고 다시 엄마가 그녀에게 보낸 사진을 확인해야겠다. 그녀는 진순 아저씨의 말에 잠자코 귀 기울였다.


“어제 너네 아버지가 술 많이 마신 이유가 그중에 한 놈을 만났기 때문일 거야. 아까 얘기했던 그 초대장 보낸 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하는데 나도 속이 뒤집어지더라. 너희 아버지도 꽤나 깊이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거 같았지.”

“아, 어제 만나셨군요. 그 사람이랑 중학교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뭐 다들 알만한 그런 일들이지. 힘 좀 세고 덩치 있는 애들의 괴롭힘, 왕따, 모욕, 폭력, 협박 같은 거. 너도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좀 알 거 같은데?”

“아…”

“나나 너희 아버지뿐만 아니라 학급 전체가 피해자였어. 주머니를 턴다거나 아무 이유 없이 때린다거나 그런 일들이 매 쉬는 시간마다 일어난 거지. 특히 일정 기간 동안 괴롭힘의 집중 타깃이 된 학생은 정말 괴로워했고. 간혹 나도, 너희 아버지도 그렇게 타깃이 되기도 했는데. 더 무서운 건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던 담임이었어. 뭐 그놈들 부모가 지역 유력 정치인이라던가 장군이라던가, 여하튼 힘 있는 사람이란 소문이 있었으니까. 40년이 지났는데 다른 학년 담임선생님 이름은 기억이 안나도 그 담임 이름은 기억나. 류천섭라고.”


진순 아저씨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주문벨이 울렸다.


“아, 아저씨. 제가 가지고 올게요.”


그녀는 주문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서 커피 두 잔과 빨대, 봉지에 쌓인 작은 비스킷 두 개, 티슈 몇 장이 놓인 둥그런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왔다. 아빠 중학교 시절에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구나. 쟁반을 놓으며 아빠 나이를 역산하여 중학교 시절이 몇 년 전인지 계산했다. 대략 40년 전이었다. 아득한 시간이었다.


“아, 아저씨. 잘 마시겠습니다.”


그녀는 빨대의 비닐을 벗기고 유리잔에 꽂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근데 이 책은 졸업 문집 같은 건가요?”

“응. 뭐 결국에 완성하진 못했지만 졸업 문집을 내려고 했지. 내가 반장이어서 다 같이 만들자고 글을 모았는데 결국 담임한테 빠꾸 먹었어. 못 만들게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건 지구상에서 한 권 밖에 없는 책이야.”

“이 책이 아저씨가 전해주고 싶다고 말씀하신 그건가요?”

“그렇지. 아마도 그거 읽어보면 너희 아빠가 왜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는지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마라. 너도 알다시피 술 겁나게 약하잖냐. 어디 찜질방에서 자느라 연락 안 되는 거 아닐까 싶은데?”

아빠가 중학생일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마 문집에 그와 관련한 내용이 있을 것이다.

“어제 동창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진순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시작했다.

“어제 너네 아버지 연락받고 미주 도착한 시간이… 한 4시쯤이었을 거야. 역에서 만나서 너희 아버지 차 타고 학교에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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